무분별한 악의적 댓글은 한 개인의 영혼을 멍들게 한다. 대중 노출이 활발한 스포츠-연예 스타들이 주 타깃이 되는 탓에 국내 유명 포털사이트의 스포츠/연예 기사에는 아직도 댓글을 달 수 없도록 제한되고 있다.
근거 없는 악의적 댓글의 폐해는 비단 한 개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멀쩡한 기업도 망가뜨린다.
오는 30일 개원을 앞둔 22대 국회에서 악의적 허위 사실 및 미확인 정보로 얼룩진 인터넷 악성 댓글에 대한 규제 강화를 신속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산업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네티즌들의 실시간 소통과 온라인 공론의 장으로 각광받았던 온라인 댓글창이 일부 이용자들의 무분별한 오남용으로 인해 인해 개인 또는 기업을 겨냥한 악의적 허위 정보와 편중된 여론조작의 장으로 오염될 수 있다는 우려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실제로 일반인과 유명인을 가리지 않고 특정 의혹이 제기되면 미확인 정보와 자극적 표현이 가득한 악성 댓글이 금세 포털 등의 댓글창을 뒤덮는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무분별하게 재생산된 허위 정보는 피해자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기며 비극적 사태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자칫 허위 사실로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판매량 증대를 노리고 경쟁 업체를 비방하는 악성 댓글을 조직적으로 올리거나, 돈을 받고 실사용자를 빙자한 허위 리뷰를 작성해주는 전문대행사도 등장했다.
국내 온라인 악성 댓글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연 35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21대 국회에서도 악성 댓글 문제의 심각성에 공감해 규제 강화를 골자로 하는 법안이 다수 발의됐지만, 여야 정쟁과 무관심 속에 우선 순위에서 밀리며 임기가 끝나는 5월 29일 이후 자동 폐기될 처지에 놓여 있다.
▲ 악성 댓글, 일반인과 유명인 가리지 않아… 무분별한 ‘좌표 찍기’의 폐해 심각
개인에 대한 인터넷 댓글 속 악성 허위 및 미확인 정보는 신빙성이 없더라도 관심을 끌만한 자극적 내용들이기에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허위 정보를 그대로 수용한 다른 네티즌들의 댓글이 댓글 창을 뒤덮으며 어느새 루머는 팩트로 둔갑한다.
무분별하게 퍼지는 자극적 허위 정보는 군중 심리를 자극해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특정인에 대한 집단 괴롭힘을 뜻하는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 이른바 ‘좌표 찍기’로 이어지기 쉽고, 마음의 상처를 입은 피해자는 우울증을 앓거나 해서는 안될 선택에 이르기도 한다.
지난 3월 스스로 생을 마감한 김포시청 공무원 A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야간에 실시된 긴급 도로공사와 관련해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차량 정체가 극심하다’며 담당 공무원 A씨의 신상과 개인정보가 올라왔다. A씨는 당일 자정 이후까지 현장을 지켰지만, 댓글창에는 ‘공사 승인하고 집에서 쉬고 계신 분’이라거나, ‘집에서 쉬고 있을 이 사람 멱살을 잡고 싶다’는 등의 허위 사실이 담긴 악성 댓글이 다수 달렸다. 지속되는 악성 댓글과 민원 등 비난에 괴로워하던 A씨는 닷새 뒤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연예인 등 유명인을 겨냥한 악의적 허위 댓글은 더욱 심각한데, 특정 이슈가 발생하면 재빨리 콘텐츠를 만들어 조회 수로 돈벌이하는 ‘사이버 렉카(Cyber Wrecker)’들이 이 같은 현상을 주도하고 있다.
교통사고 현장에 경쟁적으로 달려가는 견인차처럼 ‘사이버 렉카’는 루머에 대한 확인 대신 조회 수를 노린 선정적 제목과 내용 짜깁기를 서슴지 않는다.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 등 유명인들의 열애설과 불화설, 채무 논란 등 종류도 다양하다. 멀쩡한 사람이 암 환자로 둔갑하는가 하면, 활동이 뜸한 일부 배우 등 유명인들이 근거 없는 사망설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2022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20대 배구선수는 자신의 SNS에 “저를 괴롭혀온 악플은 이제 그만해 달라. 버티기 힘들다”고 호소한 바 있고, 지난해 12월 고 이선균 배우 사망 당시에도 사건과 관계없는 사생활을 충분한 취재나 확인 없이 경쟁적으로 폭로한 사이버 렉카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일었다.
지난 2월 한국언론진흥재단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사이버 렉카가 사회적 문제라는 점에 공감하는 비율은 92%에 달한다. 사이버 렉카 콘텐츠로 인한 유명인의 권리 침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94.3%)가 가장 많이 꼽혔고 ‘피해자 구제 제도 강화’(93.4%), ‘플랫폼 자율규제 강화’(88.2%)가 뒤를 이었다.
▲ 기업, 악의적 댓글로 치명적 손실 가능성… 허위 입증해도 피해 회복 쉽지 않아
고객과 사회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기업은 악성 허위 정보 또는 미확인 정보가 담긴 악성 댓글의 여과 없는 확산으로 자칫 회복 불가능한 치명적 손실을 입을 수 있다.
최근 법원은 지난 2017년 경쟁업체에 대한 허위 비방 댓글을 조직적으로 작성해 손해를 끼친 한 유아매트 업체 B사 대표에게 이례적으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경쟁사 제품의 친환경인증이 취소되자 불법적으로 구매한 수백개의 아이디를 활용해 맘카페 등에서 소비자인 척 후기 및 댓글을 조작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된 것이다.
당시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은 친환경 인증 취소에도 경쟁사 매트의 인체위해성은 없다고 밝혔지만, B사 대표 등은 경쟁사 매트가 ‘독극물 매트’라거나 경쟁사 매트를 없애니 아이의 아토피가 없어졌다는 등 불안감을 조성하는 거짓 후기와 댓글을 다수 게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업계 2위이던 B사는 1위로 올라서며 현재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 경쟁사는 매출이 90% 이상 급감했다. 급기야 이듬해에는 적자로 전환해 공장 매각 등 존폐 위기에 설 정도의 피해를 입었고, 7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악성 허위 댓글로 인한 피해는 대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2016년 A사는 현대자동차가 자신의 기술을 탈취했다고 주장하며 1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현대차 측은 기술 탈취가 없었다는 입장을 유지했고, 사법부는 1심과 항소심, 상고심에서 모두 현대차의 손을 들어줬다. 기술 탈취 등 부당한 행위는 없었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현대차는 소송이 진행된 기간 동안 ‘협력업체는 안중에 없느냐’ 등 대기업을 향한 근거 없는 비방성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기술 탈취 의혹은 벗었지만, 악성 댓글은 고스란히 남아있고 작성자 중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재계 관계자는 “허위 사실임을 입증한 뒤에도 악성 댓글은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피해 회복도 쉽지 않다”라며 “저질 제품의 홍보 댓글을 돈을 받고 작성하는 전문대행사가 등장하는 등 온라인 댓글창은 이미 편중된 여론조작의 장”이라고 지적한다.
▲ 국민 10명 중 8명 악성 댓글 규제 ‘찬성’… “22대 국회, 규제 강화 신속히 착수해야”
현행법상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위계 등으로 업무를 방해했다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악성 댓글에 악의적 허위 사실이 포함돼 있는 경우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7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형도 가능하다.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8명이 악성 댓글 규제에 찬성하는 등 규제 및 처벌 강화를 통해 무분별한 악성 댓글로 인한 사회적 폐해를 근절해야 한다는 여론은 지배적이다.
지난 5년간 21대 국회에서 악의적 허위 사실 또는 미확인 정보를 포함한 게시글과 댓글에 대한 규제 및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하는 10건의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임기 만료에 따른 자동 폐기를 앞두고 있다.
이런 탓에 22대 국회 개원 후 악성 댓글에 대한 실효성 있는 민∙형사적 규제 강화에 조속히 착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특히 악성 댓글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재발 방지를 위한 경고 효과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모두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 규제 방안이라는 평가가 많다.
한 전문가는 “악성 댓글로 인한 사회적 폐해가 심각하다는 공감대가 일찍이 형성됐지만, 표현의 자유 등에 가로막혀 번번이 법 개정이 좌초됐다”며 “조속한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앞으로도 많은 피해자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