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아시안컵의 저주일까? 64년 만에 주술에서 벗어나 희망봉에 닿으려는 염원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을는지…. 생각지 못한 암초들의 돌출에,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태극호’의 간댕간댕한 항해는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아니, 부아가 몹시 치밀어 오르기까지 한다. 그 근인(根因)이 태극호 자체에 있어서 그렇다.
한마디로, 태극호를 지휘하는 선장 역을 맡은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자초한 고난의 항해다. 한 나라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전장에 나선 장수로서 전략 부재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해 태극호를 좌초의 위기에 빠뜨렸다. 큰 줄기의 전략이 없으니, 적시 적소에 응용하고 대처할 전술이 변변히 운용될 리 없었다. 제1막(그룹 스테이지)에서, 태극호가 제 항로를 벗어나 혼돈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제1 원인이다.
2023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항해에 나선 클린스만 선장은 희망봉, 곧 64년 만의 재등정을 목표로 내세웠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사상 최강의 승조원으로 태극호를 구성했다”라는 일반적 평가에, 고무된 클린스만 선장은 ‘우승 항해’ 야망을 숨김없이 내비쳤다.
그렇다면 의당 이에 초점을 맞춘 전략을 구상하고 세워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아시아 최고 권위의 챔피언십 무대에 최상의 작품을 올리려는 연출자라고는 보기 힘든 ‘갈지자 행보’로 나타난 전략 부재였다.
상황의 변화에 따른 전략의 변화였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뜻하지 않은 변화에서 말미암은 화 자체도 스스로 불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치밀한 구상 끝에 세운 전략이 존재했고 그에 맞춰 한판 한판을 치렀다면, 능히 피할 수 있었던 암초들이었다.
한 대회를 관통하는 전략 아쉬워… 임시변통적 전술로는 우승 염원은 헛된 꿈
이번 대회 조 편성이 나왔을 때, 합리적 사령탑이라면 우승의 지름길을 분석하고 파악해 가장 좋은 전략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과 더불어 아시아 축구 양강으로 손꼽히는 일본과 결승전에서 만나는 시나리오를 구상했을 듯싶다. D그룹 일본과 E그룹 한국은 각각 조별 라운드를 1위로 통과할 경우, 결승전에서 만나는 조 편성이었다.
클린스만 감독도 이렇게 생각했을 듯싶다. 하지만 실전에서 나타난 전략은 전혀 아니었다. 전략 부재라는 비난을 감내해야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두 번째 판 요르단전(20일·2-2)과 세 번째 판 말레이시아전(25일·3-3)에서, 단적으로 이를 엿볼 수 있다.
요르단전보다 하루 앞선 열린 D그룹 2라운드에서, 일본은 예상 밖으로 이라크에 1-2로 무너졌다. 상식적으로, 일본이 그룹 스테이지를 1위로 통과할 가능성은 무척 작아졌다. 반면, 2위 가능성이 커졌다.
답은 나왔다. 클린스만 감독은 요르단을 맞아 힘을 비축할 호기를 맞았다. 비기는 데 비중을 높인 전술이 필요했다. 1차전에서 똑같이 1승씩을 올리긴 했어도, 한국은 골 득실(2-4)에서 뒤져 조 2위에 자리한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클린스만 감독은 ‘보여 주기식’ 해법을 들고나왔다. 매 경기 최선을 다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러나 숙적 일본과 결승 한판을 그리는 전략을 구상했다면, 피해야 할 실리 없는 전술이었다. 묘책 없이 적진을 어지럽히기만 한 강공은 자칫 역전패의 화를 부를 뻔했다.
이 한판에선, ‘경고 관리’가 효율적 전술이었다. 바레인을 맞아 치른 첫판(15일·3-1)에서, 한국은 무려 5명(박용우·김민재·이기제·조규성·손흥민)이 옐로카드를 받았다. 손흥민을 비롯해 모두가 공격-허리-수비의 중추를 이루는 자원이었다. E그룹 최약체로 평가받던 말레이시아전을 앞두고, 이들이 적당한 시간에 한 차례 더 옐로카드를 받는 전술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말레이시아전에 결장한 뒤 녹아웃 스테이지(16강전~결승전)에 출장케 하는 방책이 더 현명했다.
이번 대회는 그룹 스테이지부터 8강전까지는 옐로카드가 유효하다. 말레이시아전에서도, 한국은 이재성이 옐로카드를 받았다. 이제 이들이 16강전에서 한 차례 더 옐로카드를 받는다면, 더 중요한 단계인 8강전에 – 그래도 태극호가 진출하리라 믿으며 – 나설 수 없다. 즉,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경고 관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됐다.
말레이시아전은 더욱 한심한 전략 실종을 그대로 드러냈다. 하루 전 끝난 D그룹 조별 라운드에서, 일본은 결국 2위에 그쳤다. 만일 한국이 E그룹 1위에 오른다면 운명의 한-일전이 16강 마당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나타났다.
원전략대로 하면, 말레이시아전은 한국은 쉬어 가는 한판이다. 그런데 클린스만 감독은 지난 두 경기와 마찬가지로 베스트 11을 그대로 내세웠다. 몸이 좋지 않은 이기제 대신 김태환을 출장시켰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후반 한때 1-2로 뒤지며 역전패의 위기에 내몰리기까지 했다. 선장이 갈팡질팡하며 그때그때 다른 전략을 취하면서 임시변통적 전술을 지시하니, 승조원이 하나가 된 응집력을 발휘하기란 좀처럼 풀기 어려운 과제였다. 인도네시아와 치른 그룹 스테이지 마지막 한판(24일·3-1))에서, 일본이 과감하게 8명씩이나 달라진 스타팅 멤버로 새로운 모습의 베스트 11을 선보인 점과는 극히 대조적이었다.
변수는 같은 시간에 열린 바레인-요르단전에서 갑작스럽게 터져 나왔다. 예상을 뒤엎고 바레인이 1-0으로 이겼다. 후반 추가 시간 4분에, 손흥민이 페널티킥으로 재역전 골(3-2)을 넣으며, 상황이 묘하게 꼬였다. 이대로 끝나면, 한국이 뜻하지 않게 조1위가 돼 일본과 16강전을 벌이게 됐다.
그런데 11분 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 말레이시아가 세 번째 동점골을 넣으며, 반전을 거듭했던 한판은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조 1위는 졸지에 바레인(2승 1패)에 돌아갔다. 한국(1승 2무)은 2위에 자리하며 일본을 16강전에서 만나지 않게 됐다.
그래서일까? 말레이시아의 마지막 동점골이 나왔을 때, 클린스만 감독은 일본을 피할 수 있게 됐다는 듯 미소를 띠는 촌극을 빚었다. 비난받아 마땅한 태도였다. 앞서 ‘매 경기 최선’의 전략을 내세운 장수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율배반적 자세였다.
또한, 전장에 나선 장수로선 할 수 없는 말로 팬들의 화를 증폭시켰다. “두 팀이 각각 3골씩 주고받는 멋진 경기를 연출했다.” 제3자가 아닌, 해당 전투를 지휘한 장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 어려운 ‘망언’이었다.
이제 한국은 오는 30일 오후 7시(한국 시각 31일 오전 1시), 사우디아라비아와 8강 티켓을 놓고 물러설 수 없는 일전을 치른다. 늦긴 했어도, 클린스만 감독이 지금이라도 우승 염원을 실현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을 보여 줬으면 싶다. 폭등하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뚝심 있게 투자한 제작자, 대한축구협회(KFA)가 얼굴을 들 수 있는 작품을 내놓았으면 좋겠다. 아울러 수준 높은 한국 축구팬들의 기대에도 부응하는 연출력을 보여야 함은 물론이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