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홍윤표 선임기자] ‘2014년 10월, 아일랜드에서 열린 2014 세계 젊은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탈북 대학생 박연미는 북한의 처참한 인권 상황을 폭로하는 연설을 했다. 울먹이며 말을 이어가던 그녀는 “북한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은 없고 오직 프로파간다만 있을 뿐”이라며, 전 세계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조차 북한 사람들은 모른다고 말했다.’(한상언, ‘북한 번역문학 연구의 현황과 과제’ 머리글 중에서)
탈북 학생의 말대로 북한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번역되지 않았을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한상언 한국영화연구가는 최근 『1960년대 이전 북한의 번역서-스탈린 거리의 평양책방』(한상언· 김명우 엮음)을 통해 이 같은 주장이 북한의 번역서 출판의 실상과는 전혀 다른, 왜곡된 사실임을 밝혔다. 그는 “박연미의 연설에 대해 의문이 드는 건 상식이다. 학교가 있고 세계문학을 교양으로 배우는 곳 어디든 셰익스피어에 대해 배우며 작품에 관해 이야기한다. 북한이라고 예외는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 책에는 북한에서 이미 1950~60년대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햄릿』(1958), 『베니스의 상인』(1958), 『오셀로』(1959), 『로미오와 줄리에트』(1962), 『쉑스피어 희곡선』(1963) 같은 작품들이 번역 출판됐음을 실물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스탈린 거리의 평양책방』은 1960년대 이전 북한의 번역서를 집중 조명한, 이채로운 책(도록)이다. 한상언영화연구소가 ‘접경인문학자료총서’ 시리즈 6번째로 펴낸 이 책은 ‘접경인문학연구단’의 첫 자료 총서였던 『평양책방』에 이은, “접경성을 한층 더 심화시킨 자료집”(손준식 중앙대· 한국외대 HK+ 접경인문학연구단 단장)이다.
『평양책방』이 해방과 한국전쟁 직후 월북한 예술가들이 북한에서 출판한 책들로 구성됐다면, 『스탈린 거리의 평양책방』은 1950~60년대 북한에서 번역된 책들을 모은 것이다. 손준식 단장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서 번역된 책은 소련 중심의 동유럽 국가들로부터 온 것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미국과 유럽, 일본을 포함해 전 지구적”이다.
이 자료 총서는 연구단이 라키비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1일부터 올해 2월 28일까지 열었던 특별전 ‘DMZ와 그 너머’에 전시됐던 자료들의 도록이다.
연구단이 굳이 도록을 자료집으로 발간하기로 한 이유는 “북한의 출판물, 그중에서도 특히 북한에서 번역된 책들이 기초자료가 아직 미흡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자료 총서는 그간 우리가 북한에서 출간된 책을 접할 때 표지를 비롯해 번역자들의 중요한 정보들이 누락 됐던 한계를 넘어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번역서들의 총합이다.
『스탈린 거리의 평양책방』은 1950~60년대 북한 발행 외국문학 번역서 자료들 가운데 시(30권), 소설(77권), 희곡(13권), 평론(23권), 수기(9권), 작품집(51권), 아동(20권), 미술(2권), 연극/영화(10권), 기타(3권) 등으로 나누어 책 이미지와 간단한 해제를 곁들여 실어 놓아 독자나 연구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뜻깊은 책들을 지속으로 발간하고 있는 한상언영화연구소는 남북한 영화 및 동아시아 영화 자료의 체계적 수집과 전시, 연구를 위해 2018년 4월 설립한 학술연구기관이다. 현재 이 연구소에는 북한에서 발행된 단행본과 잡지 등 총 5,000여 점이 넘는 문헌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해방 후부터 1960년대까지 북한에서 발행한 문학예술 도서 250점을 전시하는 『평양책방』을 2018년 서울도서관에서 개최하여 국내외의 큰 관심을 받았다. 또 2020년에는 한국영상자료원 영화박물관과 함께 ‘혼돈의 시간 엇갈린 행로-해방공간의 영화인들’이라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기념전시를 개최했다. 연구소의 주요 출판물로는 『평양책방』(2018), 『월북영화인 시리즈 1~3권』(『문예봉 전』, 『강홍식 전』, 『김태진 전』)(2019), 『멜랑콜리 연남동』(이효인 저), 『영화운동의 최전선』(2022), 『스탈린거리의 평양책방』 등이 있다.
(사진 제공=한상언영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