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적응에 힘들어도, 상대 수비가 거칠어도. 손흥민(31, 토트넘)은 역시 손흥민이었다.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16일 오후 8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1차전에서 싱가포르를 5-0으로 대파했다.
이로써 한국은 2차 예선 C조 1위에 오르며 11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향한 여정을 기분 좋게 시작했다. 이제 한국은 중국 선전으로 이동해 21일 중국과 2차전을 치른다.
FIFA 랭킹 24위 한국은 지난 1990년 7-0 승리 이후 33년 만에 만난 싱가포르(155위)를 어렵지 않게 잡아냈다. 동시에 맞대결 15경기 무패(14승 1무)를 달렸다. 오심으로 인한 골 취소와 골대 불운도 있었지만, 전반 막판 나온 조규성의 선제골과 후반전 나온 황희찬-손흥민-황의조-이강인의 소나기 골을 앞세워 대승을 거뒀다.
한국은 4-2-3-1 포메이션으로 시작했다. 조규성이 최전방을 책임졌고, 황희찬-손흥민-이강인이 공격 2선을 구성했다. 황인범-이재성이 뒤를 받쳤고, 이기제-김민재-정승현-설영우가 수비진을 꾸렸다. 골문은 김승규가 지켰다.
좀처럼 선제골이 나오지 않았다. 한국은 수비 라인을 높게 올려 싱가포르 골문을 두드려 봤지만, 골운이 따르지 않았다. 전반 22분엔 이재성이 골망을 흔들었으나 오심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전반 34분 조규성의 강력한 발리슛도 골대를 때리고 나왓다.
전반 막판 드디어 결실이 나왔다. 전반 44분 이강인이 수비 라인 뒤로 절묘한 왼발 롱패스를 찔러넣었다. 이를 침투한 조규성이 정확한 왼발 슈팅으로 마무리하며 기다리던 선제골을 터트렸다. 지난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골을 합작했던 이강인-조규성 듀오의 찰떡 호흡이었다.
이후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후반 시작 4분 만에 황희찬이 추가골을 터트리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그는 조규성이 올려준 크로스를 정확한 헤더로 마무리하며 지난 베트남전에 이어 또 득점을 기록했다.
주장 손흥민도 득점 행렬에 참가했다. 그는 후반 17분 우측 공간에서 공을 잡은 뒤 수비를 따돌리고 환상적인 왼발 감아차기로 골문 구석을 꿰뚫었다. 이른바 '손흥민 존'에서 나온 멋진 득점이었다. 이번 득점으로 그는 A매치 39골을 기록하며 득점 순위 2위 황선홍(50)과 격차를 줄였다.
4번째 골도 빠르게 나왔다. 후반 21분 이강인의 뒤꿈치 패스를 받아 돌파하던 설영우가 귀화 선수 송의영에게 걸려 넘어지며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키커로 나선 황의조가 침착하게 골키퍼를 속이고 골망을 가르며 4-0을 만들었다.
이강인도 골 맛을 봤다. 후반 40분 싱가포르 수비가 머리로 걷어낸 공이 박스 바깥 이강인 앞에 떨어졌다. 그는 강력한 왼발 슈팅으로 가까운 골문 쪽에 꽂아 넣으며 3경기 연속골을 터트렸다.
이로써 한국은 앞선 튀니지전(4-0)과 베트남전(6-0)에 이어 4골 이상을 뽑아내며 화력을 자랑했다. 대표팀이 3경기 연속 4골 차 이상 승리를 거둔 건 지난 2000년 아시안컵 이후 8621일, 무려 23년 만이다.
주장 손흥민의 활약도 빛났다. 올 시즌 소속팀 토트넘에서도 리그 8골 1도움으로 맹활약 중인 그는 태극마크를 달고도 두 경기 연속골을 터트리며 존재감을 뽐냈다.
이날 손흥민은 프리롤을 맡으며 경기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중앙과 양 측면을 자유롭게 오가며 공격을 이끌었다. 때로는 조규성과 함께 투톱처럼 뛰었고, 때로는 한 칸 내려와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후반엔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뛰면서 황의조-오현규 투톱을 보좌했다.
득점 장면도 손흥민다웠다. 그는 공간이 열리자마자 왼발 감아차기로 골키퍼가 손 쓸 수 없는 슈팅을 터트렸다. 정말 여지 없는 골이었다. 손흥민은 경기 전날까지만 해도 시차 적응 때문에 힘들다고 했지만, 클래스는 어디 가지 않았다.
다만 손흥민은 후반 막판 상대의 거친 반칙과 집중 견제에 쓰러지며 우려를 낳기도 했다. 그는 무릎 부근을 세게 걷어차인 뒤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미 교체 카드 5장을 모두 소화한 상황이었기에 손흥민은 꿋꿋이 풀타임을 소화했고, 경기가 끝난 뒤에도 관중석을 향해 인사를 건네며 팬들을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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