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수도' 빅버드가 팬들의 분노로 뒤덮였다.
수원 삼성은 지난 26일 김병수 감독을 경질하고 플레잉 코치로 뛰던 염기훈에게 감독대행을 맡긴다고 발표했다. 수원은 "구단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타개하고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라고 사령탑 교체 배경을 설명했다.
오동석 단장도 직접 입장을 밝혔다. 그는 "현재 상황을 직시하고 앞으로 남은 7경기 동안 과연 반전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검토한 결과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구단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 남은 경기 최선을 다하고 시즌을 마친 후 서포터스들의 평가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라고 전했다.
수원은 현재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며 강등 위기에 처해 있다. 지난 5월 김병수 감독이 이병근 감독과 최성용 감독대행의 뒤를 이어 소방수로 부임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수원은 김병수 감독 체제 두 번째 경기였던 강원전 승리를 시작으로 5경기 무패(2승 3무)를 달리며 반등하는가 싶었으나 최근 연패에 빠지며 다시 12위가 됐다. 결국 김병수 감독은 어렵사리 수원 사령탑을 잡은 지 5개월 만에, 시즌 7경기를 남겨둔 중대한 기로에서 지휘봉을 내려놓게 됐다.
충격적인 소식에 수원 팬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 대상은 김병수 감독이 아닌 구단 수뇌부였다. 팬들은 머리까지 삭발하고 나선 김병수 감독에게는 위로를 전했고, 프런트를 향해 비난을 쏟아냈다. 수원의 소셜 미디어 게시글에는 수원 팬분들만이 아니라 다른 K리그 팬들까지 모여들어 구단 행보를 지적했다.
특히 구단 레전드 염기훈을 방패막이로 내세웠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프런트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애꿎은 염기훈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 그는 플레잉 코치로 뛰고 있긴 하지만, 정식 지도자 경력은 사실상 전무하다. 강등이 코앞으로 다가온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염기훈에게 지휘봉을 맡기는 게 맞느냔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팬들의 분노는 온라인상에서 그치지 않았다. 팬들은 수원월드컵경기장에 직접 근조 화환을 보내고 직접 경기장을 찾아 걸개를 걸고 포스트잇을 붙이는 등 행동에 나섰다. 구단 앞으로 배송된 근조 화환만 10개가 훌쩍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27일 직접 방문한 수원월드컵경기장은 수원 팬들의 절절한 한(恨)으로 가득했다. 구단 팬샵 외관은 팬들이 붙인 메시지로 뒤덮여 있었다. 팬들은 포스트잇과 스케치북을 활용해 하고 싶은 말을 토해냈고, 다른 팬들이 추가할 수 있도록 포스트잇과 펜도 놓여 있었다.
대부분이 구단 프런트를 거세게 비판하는 문구였다. 부주장인 고승범과 전 주장 이기제 등을 향한 위로의 메시지도 찾아볼 수 있었다. 감독대행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염기훈의 사진 옆에는 "기훈 언제나 우린 너와 함께해", "영원한 나의 자랑, 나의 26", "어떤 결과가 나와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이 선택을 그저 응원합니다" 등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
수원 팬들은 김병수 감독을 향해 애정과 위로를 담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바닥에는 "병수 언제나 우린 너와 함께해"라는 큰 걸개가 자리했고, "On Your Side Always"라는 플래카드도 눈길을 끌었다. 김병수 감독이 그려진 기둥은 첫 승 후 선수들에게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을 담은 사진과 각종 응원 메시지로 빼곡했다.
팬샵 옆에는 장례식장에서나 볼 수 있는 제상까지 차려져 있었다. 제기와 향, 과일은 물론이고 흰 국화 다발들, "우리의 청춘과 낭만을 짓밟지 마라"라고 적힌 유니폼, 머플러도 줄을 이었다. 대표 응원 문구인 "SUWON till I Die."에서 'till'과 'I'에 가위표가 그어진 "SUWON Die." 걸개 역시 눈길을 끌었다.
축구 수도이자 축구 성지였던 빅버드는 단숨에 추모와 울분을 표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한두 개가 아닌 국화 다발에서 수원 팬들의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수원월드컵경기장에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허탈한 마음과 슬픈 마음을 표현하려는 수원 팬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수십 명은 아니었지만, 몇몇 팬들은 우산을 쓰고 나타나 포스트잇에 진심을 눌러 담았다. 한 팬은 꽃다발과 함께 "레전드 고기방패 세우는 삽질 X런트"라는 근조 리본을 달고 가기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쓸쓸한 빅버드의 가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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