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항저우(杭州) 아시안 게임에서,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U-23대표팀은 ‘세 마리 토끼’를 노린다. 대회 3연패와 더불어 최다 우승(6회)의 야망을 부풀린다. 그리고 또 한 마리는 ‘황선홍호’ 출범(2021년 9월) 후 첫 정상 정복이다.
닻을 올리고 첫출발은 아주 좋았다. 대회 막이 오르기(23일) 전 나흘 앞서(19일) 시작된 축구 종목 그룹 스테이지(E) 첫판에서, 한국은 쿠웨이트를 9-0으로 크게 이겼다. 국제 대회에서 보기 드문 대승으로, 대망이 이뤄지리라는 낙관에 들뜨게 하는 쾌조의 첫걸음이었다. 단순히 스코어를 떠나 경기 내용 측면에서, 완벽한 경기력을 한껏 펼쳤다는 점은 더욱 희망적 요소였다.
정신적 측면에서도 돋보였다. 충만한 자신감이 바탕을 이룬 경기 운영은 나무랄 데 없었다. 역대 전적에서 나타나듯, 쿠웨이트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A매치 기준으로, 한국이 12승 4무 8패로 약간 우세할 뿐이다. 이렇듯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쿠웨이트에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낙승을 거뒀다는 점에서도, 희망의 신호탄이 된 한판이었다.
그런데 황선홍호는 한 가지를 가슴속 깊이 다시금 아로새겼으면 한다. 기우(杞憂)라고 생각하고 싶으나, 자신감이 자만감으로 변질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패배감에 사로잡혀 자신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신감에 넘치다 못해 자만감이 야금야금 피어올라선, 자칫 다 된 죽에 코를 푼 꼴이 되기 십상이다.
괜스레 잡으려고 하는 트집이 아니다. 역대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이 남긴 발자취를 다시 더듬어 본 데서 나온 고언(苦言)이다. 특히, 29년 전을 되돌아보면 더욱 하고 싶은 쓴소리다. 그때엔 더 큰 승리의 개가를 올렸건만, 마지막 결실은 초라했다. 목표로 했던 금메달은 허무한 꿈에 지나지 않았던 1994 히로시마(廣島) 아시안 게임이었다.
자신감이 가득 넘쳐 자만감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마음가짐 필요
1994년 10월 13일, 아나톨리 비쇼베츠가 이끌던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충격적 한판패(0-1)를 당했다. 1994 히로시마 대회 준결승전에서, 한국은 우즈베키스탄에 통한의 한 골을 내주고 우승의 꿈을 접었다. 일방적 공격을 퍼붓고도 역습 한 방에 무너져 정상을 향한 진군을 멈췄다. 절망감은 동메달(3-4위) 결정전까지 영양을 미쳐, 쿠웨이트에 1-2로 역전패하며 동메달마저 놓쳤다.
그 대회에서, 한국은 무척 산뜻한 스타트를 끊었다. 네팔과 맞붙은 서전을 대승(11-0)으로 장식했다. 지금까지 역대 아시안 게임을 통틀어, 한국이 가장 큰 점수 차로 승리한 한판이다. 이 경기에서, 최다 득점을 기록한 골잡이는 바로 이번 항저우 대회 지휘봉을 잡고 있는 황선홍이었다. 에이스로서 주득점원이었던 황선홍은 물경 8골을 터뜨리며 대승의 물꼬를 텄다.
암운은 곧 드리워졌다. 조별 라운드(C) 마지막 쿠웨이트전에서 0-1로 지며 낀 어두운 구름은 4강전을 뒤덮었다. 종내 먹구름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히로시마 여정’을 끝내야 했던 한국이었다. 자만감으로 변질된 자신감을 다시 추스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실히 엿볼 수 있었던 대회였다.
물론, 자신감으로 되돌려 정상까지 밟은 대회도 있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김학범호’는 용궁에 갔다 온 토끼가 됐다. 조별 라운드(E) 첫 경기에서, 한국은 바레인을 6-0으로 대파했다. 자만했을까, 두 번째 말레이시아전에서 발목을 잡혔다. 만만히 봤던 말레이시아에 어이없이 1-2로 졌다. 다행히도 일찍 마신 고배는 보약이 됐다. 조2위로 조별 스테이지를 통과한 한국은 녹아웃 스테이지에서 4연승을 내달리며 금메달을 결실했다.
역대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두 번의 공동 우승을 포함해 다섯 번 정상을 밟았다. 이란과 더불어 최다 우승에 빛난다. 지금까지 18회 치러진 대회에서, 한국과 이란을 비롯해 대만·인도·버마(이상 2회)→ 북한·이라크·카타르·일본(이상 1회) 등 모두 9개국만이 금메달의 승전고를 울렸다. 아시안 게임 축구 종목은 1998 방콕 대회까지는 국가대표팀끼리 열전을 벌이다가, 2002 부산 대회부터 U-23대표팀 경쟁 체제로 바뀌었다.
한국은 최다 금메달을 쟁취하며 ‘아시아 맹주’로서 군림해 왔다. 우승한 대회에서, 한국은 모두 첫 단추를 잘 끼웠다. 다섯 번 모두 승리로 서전을 장식했다(표 참조). 이 가운데, 5골 차 이상 이긴 대회는 단 한 번 있었다. 그리고 그 대회에선, 조별 리그 통과에 다소 어려움이 뒤따랐다. 곧, 대승이 반드시 우승의 자양분은 아님이 엿보였다.
역대 대회에서, 가장 뛰어난 전과를 올리며 등정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대회에서 항해한 ‘이광종호’는 7전 전승을 거두며 13득점 무실점의 가장 돋보이는 공수 균형력을 뽐내며 희망봉에 다다랐다. 이 대회 첫판에서 만난 상대는 말레이시아였고, 그 결과는 한국의 세 골 차(3-0) 승이었다. 적당히 기분 좋은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던 골 차의 승리였다.
이 맥락에서, 황선홍호는 서전 대승의 흥분을 씻고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자만감은 경기 중에 되돌릴 수 없다. 모든 경기를 첫걸음의 심정으로 맞이하고 진중하게 치러야 한다. ‘자신감은 갖되 자만감은 버리겠다’는 마음가짐은 금메달 고지로 가는 데 필요한 디딤돌이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