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축구를 하길 원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지난 6월 위르겐 클린스만(59)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자신 있게 한 말이다. 그리고 3개월 뒤, 축구 팬들이 느꼈던 답답함과 의문은 해소되긴커녕 더욱 커지기만 했다.
클린스만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8일(이하 한국시간) 영국 카디프의 카디프시티 스타디움에서 웨일스와 평가전을 치러 0-0 무승부를 거뒀다.
이로써 클린스만 감독의 첫 승 사냥은 또 다음 기회로 미뤄졌다. 대표팀은 지난 3월 그가 부임한 뒤 5경기에서 3무 2패에 그치며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외국인 사령탑으로서 최악의 출발이다.
이날 클린스만 감독은 4-4-2 포메이션을 꺼내 들었다. 손흥민-조규성이 최전방에서 호흡을 맞췄고, 이재성-박용우-황인범-홍현석이 중원을 형성했다. 이기제-김민재-정승현-설영우가 수비진을 꾸렸고, 김승규(골키퍼)가 골문을 지켰다.
꼭 이겨야 했던 타이밍이었다. 지금껏 대표팀 부임 후 4경기까지도 승리를 따내지 못했던 외국인 사령탑은 클린스만 감독이 처음이다. 여기에 재택근무 및 외유 논란까지 불거진 만큼, 분위기를 바꿀 유일한 해결책은 시원한 승리뿐이었다.
기대는 산산이 조각났다. 결과는커녕 내용도 잡지 못한 졸전이었다. 영국 'BBC'는 "한국은 더 많은 점유율을 기록했지만, 더 좋은 기회를 잡은 것은 홈팀 웨일스였다"라며 "한국은 주장 손흥민과 황인범의 먼 거리 슈팅뿐이었다. 이번 경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큰 팀은 웨일스였다"라고 평가했다.
초반부터 방향성을 알 수 없는 축구가 계속됐다. 파울루 벤투 전 감독이 강조하던 후방에서부터 경기를 풀어나가는 빌드업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클린스만 감독의 색채는 이번에도 드러나지 않았다.
특히 중원이 완전히 삭제됐다. 황인범과 박용우를 활용해 허리에서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약속된 플레이는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김민재가 일단 최전방으로 길게 패스하고 보는 게 주요 루트로 보일 정도였다. 물론 직선적인 롱볼 전술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만, 5백이 촘촘히 자리한 웨일스 수비 상대로는 효과적일 리 없었다.
어떻게든 공이 측면까지 가도 문제였다. 중앙지향적인 이재성과 홍현석이 좌우 날개를 맡은 만큼, 직선적인 돌파나 과감한 드리블로 수비를 허무는 장면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결국 답답함을 느낀 손흥민은 공을 만지기 위해서 계속해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손흥민도 제 기량을 펼치지 못했다. 그는 조규성과 함께 최전방 투톱으로 나섰으나 주로 중앙에 위치하며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뛰었고, 좁은 공간에 갇혀 좀처럼 장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어쩌다 측면에 공간이 생기더라도 전문 윙어가 아닌 이재성과 홍현석이 마음껏 힘을 쓰긴 쉽지 않았다.
답답한 표정을 지은 클린스만 감독은 후반 들어 교체 카드를 대거 꺼내 들었다. 황희찬, 황의조, 양현준 등 유럽파 공격수들이 경기장을 밟았다. 하지만 선수만 바뀌었을 뿐, 큰 틀은 그대로였다.
목적을 알기 어려운 플레이만 계속됐고, 오히려 웨일스의 간헐적인 역습에 위기를 맞았다. 후반 20분 상대의 결정적 헤더가 골대에 맞는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그대로 패했을 경기였다.
결국 클린스만호는 득점 없이 경기를 마치며 무승 행진을 5경기로 늘렸다. 이날 90분 동안 한국이 남긴 기록은 점유율 61%, 수비벽에 막힌 슈팅 포함 슈팅 4회, 유효슈팅 1회, 박스 안 슈팅 0회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이젠 변명거리도 없다. 클린스만호 감독은 앞선 4경기에서도 부진했지만, 지난 3월과 6월에는 나름 할 말이 있었다. 3월에는 상대도 콜롬비아와 우루과이로 남미의 강호였던 데다가 부임 직후 치른 경기였기에 선수들을 파악할 시간도 없었다.
6월에도 정상 전력이 아니었다. 공수의 핵심인 손흥민과 김민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 당시 손흥민은 스포츠 탈장 수술의 여파로 페루전에 나서지 못했고, 엘살바도르전에만 교체 출전했다. 김민재는 아예 기초군사훈련 일정 때문에 대표팀과 함께하지 못했다. 클린스만호의 답답한 경기력을 보면서도 '그래도 다음에는'이라는 생각이 조금은 들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다. 손흥민, 황희찬, 이재성, 조규성, 오현규, 홍현석, 김민재, 황인범, 황의조, 김지수, 양현준 등 유럽파 선수들만 보더라도 역대급 전력이라는 평가가 지나치지 않다. 게다가 해트트릭을 작성한 손흥민과 풀타임 활약을 펼친 김민재, 멀티골을 터트린 홍현석, 시즌 2호 골을 맛본 황희찬 등 해외파 대부분이 지난 주말 물오른 컨디션을 자랑했기에 더더욱 실망이 크다.
물론 이강인이 부상으로 제외되긴 했다. 클린스만 감독도 경기 후 창의적인 패스를 넣어줄 수 있는 그가 빠졌다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최근 13경기에서 1승밖에 없는 웨일스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웨일스는 감독이 공개적으로 경기를 치르고 싶지 않다고 할 정도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클린스만호의 색깔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는 점이 가장 실망스러웠다. 앞선 경기들과 마찬가지로 추구하는 방향은 보이지 않았고, 선수들 간 호흡도 제대로 맞지 않았다. 기본적인 빌드업은 실종됐고, 공격도 손흥민 개인 기량에 의존할 뿐이었다. 유럽 무대에서 펄펄 날던 선수들도 모두 침묵에 빠졌다.
사실 클린스만 감독이 자기만의 철학이 확고한 감독은 아니다. 그는 현역 시절 뛰어난 공격수였던 만큼 공격 축구를 좋아한다고는 말했지만, 그게 전부다. 바이에른 뮌헨이나 독일 대표팀을 이끌던 시절에도 전술 능력이 뛰어난 감독은 아니었다. 필립 람은 클린스만 감독 밑에서 제대로 된 전술 훈련 없이 체력 훈련만 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그간 클린스만 감독은 이러한 비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난 6월에도 전술적 색채를 묻는 말에 "‘내 축구가 이렇다’라기보다는 선수들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 어떤 전략에 적합한지, 어떻게 해야 100%를 끌어낼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라고 답했다. 심지어는 "어떤 축구를 하길 원하는지 물어보고 싶다"라고 반문하며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번 웨일스전은 어느덧 5번째 경기였고, 클린스만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지는 반년이나 됐다. 이젠 축구 팬들이 그에게 다시 한번 심각한 질문을 던질 타이밍이다.
클린스만 감독이 태극전사들과 함께 펼치고 싶은 축구는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다가오는 2023 카타르 아시안컵, 아니 2026 북중미 월드컵이 열리기 전에는 그 축구를 보여줄 수 있을까. 과연 클린스만 감독은 경기장 위에서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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