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강을 자부하던 미국농구가 처참하게 무너졌다.
미국농구대표팀은 3일 필리핀 마닐라 몰 오브 아시아 아레나에서 개최된 ‘FIBA 농구월드컵 2023 조별리그 J조 예선에서 리투아니아에게 시종일관 끌려간 끝에 104-110으로 덜미를 잡혔다. 대회 첫 패배를 당한 미국(4승1패)은 리투아니아(5승)에게 조 선두를 내줬지만 8강 토너먼트 진출은 확정지었다.
그야말로 굴욕의 패배였다. 경기시작과 동시에 4-2로 앞선 것이 미국의 마지막 리드였다. 이후 리투아니아는 3점슛 9개를 던져서 연속으로 모두 성공시키는 신들린 슛감각을 자랑했다. 리투아니아 선수들은 모두 유소년시절부터 함께 호흡을 맞춰온 사이라 눈빛만 봐도 통했다. 군더더기 없이 미국의 좌우 코너 약점을 제대로 공략했다. 미국의 수비는 구멍 뚫린 치즈처럼 줄줄 샜다.
골밑에서는 NBA스타 요나스 발렌츄나스에게 밀린 재런 잭슨 주니어가 5반칙 퇴장을 당했다. 수비자 3초룰이 없는 FIBA에서 발렌츄나스의 존재감은 거대했다. 파올로 반케로와 워커 케슬러가 나섰지만 수준이 달랐다. 211cm 발렌츄나스가 벤치로 가면 213cm 거인 도나타스 몬티유나스가 들어왔다. 두 선수는 21점, 10리바운드를 합작했다. 기록지에 드러나지 않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에서 수비를 잘하기로 정평이 난 오스틴 리브스는 굴욕을 당했다. 리브스가 들어오자 바이다스 카리니아우스카스가 포스트업을 시도한 뒤 파울까지 얻어냈다. 그는 리브스에게 혀를 내밀며 트래쉬토킹까지 퍼부었다. 리브스의 멘탈이 바사삭 깨졌다. 리브스는 나올 때마다 포스트업 집중공략 대상이 됐다. 결국 스티브 커 감독은 승부처에서 리브스를 쓸 수 없었다.
유일하게 잘한 선수는 앤서니 에드워즈였다. 28분 40초를 뛰면서 35점을 퍼부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에드워즈 혼자서 공격을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효율은 떨어졌다. 전문 3점슈터가 없는 팀 구성상 에드워즈가 어쩔 수 없이 슛을 도맡아 쐈다. 에드워즈는 3점슛 5/13을 기록했지만 4쿼터 결정적인 추격에서는 터지지 않았다.
1쿼터에만 12-31로 끌려간 미국은 전반전을 37-54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하프타임에 팀을 재정비한 미국은 3쿼터 시작과 동시에 연속 9득점을 하면서 46-54로 맹추격했다. 하지만 이후 다시 리투아니아에게 3점슛을 맞기 시작했다. 미국은 3쿼터 후반 4점차까지 다시 좁혔지만 결국 역전에는 실패했다.
경기장 분위기는 난리가 났다. 리투아니아에서 500명 정도의 대규모 원정응원단이 필리핀을 찾았다. 대부분 중년남성으로 구성된 이들은 엄청나게 박력 넘치는 응원을 펼쳤다. 어쩌다 좋은 플레이가 나왔을 때만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축구처럼 40분 내내 응원을 했다. 미국팀을 응원하는 대부분의 필리핀 관중들이 기가 죽어서 제대로 함성도 지르지 못할 정도였다. 리투아니아에게 불리한 판정이 나오면 “뻑큐 레프리”라며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경기 후 믹스트존 분위기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리투아니아 선수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했다. 미국 선수들은 고개를 숙이고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바빴다. 발렌츄나스는 “우리 팀의 특성은 12명의 선수가 함께 뛰는 것이다. 12명의 동등한 선수가 모두 뛸 수 있다. 누가 코트에 서든 우리 팀의 특징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게 우리가 하나로 뭉치는 이유”라며 승리를 자랑스러워했다.
리투아니아가 미국을 이긴 것은 지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이후 19년 만이었다. 당시 어린 소년들이었던 지금의 선수들이 그 장면을 보고 농구공을 잡아 다시 한 번 미국을 이긴 것이다. 리브스에게 굴욕을 안긴 바이다스 카리니아우스카스는 “우리가 미국을 이기는 경기를 수 백 번 본 것 같다. 우리는 그 경기를 보고 자란 세대다. 이제 우리가 주인공이 됐다”며 기뻐했다.
혀를 내밀며 리브스를 농락한 제스처에 대해 카리니아우스카스는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내가 리브스의 형과 함께 뛴 적이 있기 때문에 경기 전에 트래쉬토킹을 했다. 그게 전부”라며 웃었다. 이에 대해 리브스는 “지금까지 농구를 하면서 항상 날 (백인이라)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반응했다.
무려 미국을 잡았지만 카지스 막스비티스 리투아니아 대표팀 감독은 차분했다. 그는 “선수들이 경기계획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대로 실행해줬다. 선수들에게 감사하다. 미국농구의 약점을 철저히 분석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이긴 것은 슛이 기대 이상으로 너무 잘 터졌기 때문이다. 아직 대회가 끝난 것이 아니다. 오늘까지만 기뻐하고 다음 세르비아전을 준비하겠다”고 겸손하게 답했다.
에이스인 앤서니 에드워즈도 큰 충격을 받았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도 힘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는 소감을 묻자 “커 감독님과 같은 의견”이라고 일축했다. 리투아니아에 대해서는 “충분히 축하받을 자격이 있는 팀이다. 쏘는 슛마다 다 들어갔다”며 깨끗하게 패배를 시인했다.
이번 미국대표팀에서 진정한 드림팀은 코칭스태프다. 스티브 커(골든스테이트) 감독을 에릭 스포엘스트라(마이애미), 타이론 루(클리퍼스) 코치가 보좌한다. 현역 NBA 감독 세 명이 있다. 여기에 여준석의 곤자가대학 감독인 마크 퓨까지 가세했다. 미국의 패배에 대해 커 감독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골든스테이트에서 스테판 커리와 함께 현대농구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꾼 감독이 바로 커다. 이런 스티브 커에게 “농구를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단지 팬들은 커리처럼 시원하게 3점슛을 쏘는 선수가 없는 미국팀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다.
경기 후 커는 “나도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다. 잘못된 경기를 분석할 수 있는 좋은 테잎을 얻었다. 아마 오늘 밤에 비디오를 돌려보면서 잠을 자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잘 졌다고 생각한다. 오늘 전반에는 우리가 끌려갔지만 후반에는 원하는 경기력이 나왔다. 아마 선수들도 느낀 점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가 처음부터 후반전처럼 플레이해야 한다는 점을 느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에는 더 이상 샤킬 오닐이나 드와이트 하워드가 없다. NBA 전체를 봐도 가장 잘하는 센터는 미국선수가 아니다. 미국은 장신센터가 버틴 팀을 상대로 한계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재런 잭슨 주니어의 5반칙 퇴장으로 우려가 커졌다.
커는 “FIBA 농구는 NBA와 분명히 다르다. NBA에서 잘하는 선수들이라도 FIBA에서 그 경기력이 그대로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잭슨이 오늘 5반칙 퇴장을 당했다. 그는 여전히 우리 팀의 핵심전력이다. 오늘은 그의 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해결책을 찾겠다는 입장이다. 리브스를 승부처에서 제외한 이유에 대해서도 “오늘은 활약이 좋지 않았다”며 짧게 답했다.
일찍 예방주사를 맞은 미국은 차라리 잘 졌다는 입장이다. 8강 토너먼트에서 졌다면 지난 대회처럼 변명의 여지없이 그대로 메달권 탈락이다. 하지만 미국이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패하면서 오히려 8강에서 난적 세르비아를 피하게 됐다. 선수들도 각성하는 계기가 됐다.
한 리투아니아 기자는 “만약 리투아니아와 다시 붙게 된다면 어떤 점에 변화를 주겠나?”라고 커에게 질문했다. 커는 “리투아니아와 다시 붙게 된다면 그때 보여주겠다. 여기서는 말할 수 없다”고 농담하는 여유를 보였다. 커는 “오늘 경기에서 패했지만 아직 우리의 목표인 우승은 가능하다. 파리올림픽 출전권도 획득했다. 물론 지금의 상황에서 올림픽에 간다면 걱정이 크겠지만. 하하. 우선 월드컵부터 우승하도록 하겠다”며 끝까지 여유를 부렸다.
미국은 5일 이탈리아와 8강전을 치른다. 리투아니아에게 패하는 바람에 8강에서 세르비아를 피하게 된 것은 잘된 일이다. 다만 4강에서 대회 최고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라트비아 대 독일의 승자와 만난다. 천하의 미국이 국제대회서 토너먼트 대진표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인 사실이다. / jasonseo34@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