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서 펼쳐지는 명승부는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아울러 감동을 안긴다. 그뿐이랴. 승패를 예측할 수 없는 멋지고 긴박한 경기는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승패를 떠나 멋지게 이뤄진 한판을 보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싶다.
명승부전이 벌어지는 전장(戰場)의 규모가 커질수록 북받쳐 오르는 감정도 비례해 고조된다. 불꽃이 튀는 팽팽한 각축전에 매료돼 몰입할수록 흥분과 감동, 나아가 전율의 정도는 커질 수밖에 없다. 하물며 지구상 최대 인기 종목인 축구, 그것도 전 세계 최고를 다투는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을 각축장으로 빚어지는 명승부가 얼마나 큰 감흥을 자아낼지는 불을 보듯 분명하고 뻔하다. 멋들어진 한판 또 한판의 승부는 팬들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져 오래도록 살아 숨 쉬는 강한 생명력을 공통 요소로 엮여 있다.
이 맥락에서, FIFA는 역대 여자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깊은 감명을 준 명승부 6경기를 선정(표 참조)해 다시 한번 그날 그 순간을 되돌아봤다. 눈앞에 닥친 2023 호주-뉴질랜드 여자 월드컵 4강전(15~16일)을 앞두고 FIFA 누리집 뉴스난에 올린 흥미로운 기사다. FIFA가 지난 여덟 번 대회 4강전에서 지구촌 축구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가슴속에 울림을 준 명승부 여섯 개를 뽑아 소개함으로써 이번 무대 준결승전에 쏠릴 관심도를 더욱 높이려 했음이 엿보이는 기획물이다.
▲ 1991 중국 대회: 미국 5-2 독일
1991년 발원한 여자 월드컵에서, 미국은 최다(4회) 우승을 자랑한다. 그 자부심은 원년 중국 대회에서 싹텄다. 그리고 그 자양분은 4강 독일전이었다. 4개월여 앞서 열린 UEFA(유럽축구연맹) 여자 유로를 제패한 독일은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혔으나, 오히려 미국이 정상으로 가는 데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예상을 뛰어넘은 미국 대승의 주인공은 캐린 제닝스였다. 23분간의 짧은 시간에 완성한 해트트릭(전반 10, 22, 33분)은 낙승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세계 1위로 여겨지던 독일을 꺾어 한결 기뻤다. 다른 경기엔 전혀 오지 않던 약혼자(짐, 현 남편)가 지켜보는 앞에서 거둔 승리라는 점도 특별함을 더했다.”(제닝스)
▲ 1995 스웨덴 대회: 노르웨이 1-0 미국
4년 전, 첫 대회 패권을 다퉜던 두 팀, 노르웨이와 미국이 다시 만났다. 결과는 달랐다. 노르웨이가 그때의 패배(1-2)를 설욕했다(1-0). 전반 10분 만에 터진 안 크리스틴 오뢰네스의 결승골에 힘입어, 노르웨이가 달콤한 승리를 안았다. 기세를 탄 노르웨이는 자웅 맞상대로 나선 독일을 완파(2-0)하고 FIFA컵을 품에 안았다.
“마지막 몇 분 동안 미국이 크로스바를 세 번 맞혔다고 기억한다. 우리에게 운이 따랐던 것 같다. 아마도, 미국은 우리가 그들에게서 금메달을 훔쳤다고 느끼지 않았을까?”(오뢰네스)
▲ 2003 미국 대회: 독일 3-0 미국
12년 전 치욕을 잊지 않은 독일이었다. 그대로 대갚음했다. 미국의 홈그라운드에서 올린 개가라, 통쾌함은 더했다. 케르스틴 가레프레케스의 헤더 선제 결승골(전반 15분)과 후반 추가 시간(90+1, 90+3분) 섬광 같은 역습 2골을 묶어 완승(3-0)의 승전고를 울렸다. 결승전에서, 스웨덴을 연장 골든 골로 물리치고(2-1)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리는 데 디딤돌이 된 승리였다. 역시 4년 전 자국에서 열린 1999 대회에서, 두 번째 등정을 이루며 세계 최강의 자부심을 부풀렸던 미국으로선 뼈아픈 완패였다.
“90분 내내 스스로 우리 엉덩이를 걷어찬 경기였다. 독일이 우리를 유린하며 농락했다. 솔직히 그해 독일은 우리보다 나았다.”(미국 수비수 케이트 마크그래프)
▲ 2007 중국 대회: 브라질 4-0 미국
여자 월드컵 사상 최고의 개인 재능이 펼쳐진 한판이었다. 주인공은 브라질의 마르타였다. 21세(당시)의 마르타는 2골을 터뜨리며 미국에 대패(0-4)의 수모를 안겼다. 이 대회에서, 한 세대를 대변하는 골잡이의 풍모를 뽐낸 마르타는 골든 슈(7골)는 물론 골든 볼까지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이렇다 할 몸놀림을 보이지 못한 마르타는 분패(0-2)의 쓰라림을 안고 독일이 두 번째 FIFA컵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미국과 치른 한판은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월드컵 경기다. 그 경기에서, 커리어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골을 터뜨렸다. 가슴속 깊숙이 아로새겨진, 정말 완벽한 추억이다.”(마르타)
▲ 2015 캐나다 대회: 일본 2-1 잉글랜드
몰리던 일본이 한순간 승리를 거머쥐었다. 승패의 희비쌍곡선을 빚어낸 득점은 어이없게도 자책골이었다. 후반 추가 시간(90+2분), 잉글랜드의 센터백 로라 바셋에게서 나온 ‘한 골’이 승패(2-1)를 갈랐다. 일본은 승자의 기쁨을 만끽했다. 신의 짓궂은 희롱 앞에서, 잉글랜드는 비통에 잠겼다. 4년 전(2011 독일), 정상에 올랐던 일본은 두 대회 연속 결승 진출을 이루며 아시아 축구의 자존심을 곧추세웠다.
“경기가 끝난 후, 무척 상심했다.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숨을 쉴 수 없었고, 가슴이 튀어나올 듯했다. 땅이 열려 나를 집어삼켰으면 싶은 심정이었다.”(바셋)
▲ 2019 프랑스 대회: 미국 2-1 잉글랜드
여자 월드컵 명승부 6선 ‘단골손님’ 미국이 또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다섯 번째 등장한 미국이 주연을 연기했다. 잉글랜드는 미국을 빛나게 한 조연에 머물렀다. 미국이 헤더 2골을 - 전반 9분 크리스틴 프레스, 전반 30분 알렉스 모건 - 엮어 잉글랜드의 추격을 따돌렸다(2-1). 대회 네 번째 우승을 향한 항해에 도사린 암초를 걷어 낸 순간이었다. 잉글랜드를 격분케 한 모건의 ‘차 마시기’ 골 세리머니는 지금도 회자된다. 후반, 잉글랜드는 스텝 휴턴의 페널티킥이 미국 GK 앨리사 내허의 선방에 걸린 게 못내 아쉬웠다.
“영국인을 놀리는 건 그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할뿐더러 분노하기 때문에 정말 즐거웠다. 꽤 재미있었던 골 세리머니였다.”(미국 메간 라피노)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