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남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둘째임을 안다. 그러나 장남은 둘째가 태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첫째임을 절감한다. 그 전에는 그냥 외동이다.
쉐보레 트레일블레이저가 그렇다. 아우인 트랙스 크로스오버가 탄생하고 나니 비로소 자신의 공력을 다시 깨닫기 시작했다.
제너럴 모터스(GM)는 사람들에게 트레일블레이저가 트랙스 크로스오버에 비해 의심할 바 없는 상위 모델임을 깨우쳐주고 싶어했다.
지난 3월 트랙스 크로스오버가 세상에 선을 보이자 기자들은 트레일블레이저와의 간섭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GM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다.
몇 개월이 흐른 지난 19일, 트레일블레이저의 페이스리프트 모델 ‘더 뉴 트레일블레이저(The New Trailblazer)’가 출시됐다. 이제 ‘더 뉴 트레일블레이저’의 임무가 뚜렷해졌다. ‘트랙스 크로스오버와는 클래스가 다르다’는 주장을 사람들에게 설득시켜야 한다.
GM은 최근 미디어관계자들을 불러 시승행사를 열었다. 지난 2020년 고고성을 울리던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프로그램이 들어있었다. ‘오프로드’ 코스였다.
그랬다. 트레일블레이저가 트랙스 크로스오버 출시 이후 비로소 각성한 공력이 바로 오프로드 주행능력이다. GM이 자랑하는 첨단 파워트레인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개발된 스위처블 AWD(Switchable AWD) 시스템이 트레일블레이저에 설치돼 있다.
이번 페이스리프트 모델에 새로 들어온 게 아니다. 원래부터 있었다. 똑똑한 아우(트랙스 크로스오버)가 나오니 형의 스위처블 AWD를 더 크게 자랑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둘은 클래스가 다른 모델이라고 소비자들에게 알려야 했다. 그래야 이번 페이스리프트에서 꽤나 가격을 올린 명분도 선다.
GM이 이 사륜구동 시스템을 ‘스위처블’이라고 한 이유는 작은 온/오프 버튼 하나로 FWD(전륜구동) 모드와 AWD(사륜구동) 모드를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3년전 미디어 시승 때도 이 기능은 써 봤다. 그러나 그 때는 잘 닦인 고속도로에서 보다 안정적인 주행을 돕는 장치로 AWD를 활용했다. 확실히 고속주행에서도 탄탄한 안정감을 만들어냈다.
페이스리프트 모델의 미디어 시승에서는 정말로 오프로드를 달렸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한 야산에 오프로드 코스를 만들어 울퉁불퉁한 산길에서도 흔들림없이 진군하는 모습을 체험하게 했다. GM이 자랑하는 전문 오프로더, 콜로라도급은 아니었지만 일상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비포장도로라면 익숙한 산책로처럼 헤쳐 나가겠다 싶었다.
진창이 된 수렁에서도 헛도는 바퀴는 없었다. 가파른 산길을 착실하게 등판했고 공포심이 드는 내리막길도 미끄러짐 없이 내려갔다. 기자들도 의외의 발견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형 트레일블레이저에 적용된 AWD 시스템은 스위치를 ‘오프’하면 프로펠러 샤프트의 동력 전달을 차단해 FWD 모드로 주행 환경이 전환된다. 반대로 스위치를 ‘온’하면 잠시 쉬고 있던 AWD의 험로주파 성능이 되살아난다.
사륜구동모델은 서스펜션도 다르게 구성됐다. Z-링크 리어 서스펜션 시스템이 들어가 안정적인 주행을 뒷받침한다.
페이스리프트에서 완전히 달라진 곳도 있다. 19인치 휠이다. 트레일블레이저 같은 콤팩트 SUV가 19인치 휠을 소화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공간 구성을 새로 해야 할 정도로 연쇄 파장을 끼친다.
‘더 뉴 트레일블레이저’는 19인치로의 인치업을 감행했다. 이에 맞춰 서스펜션도 손봤다. 커진 휠이 몰고오는 거친 충격을 감쇄할 필요가 있었다. 소비자가 스위처블 AWD 패키지를 선택하면, 휠은 19인치 카본 플래시 머신드 알로이 휠로 업그레이드되는데, 서스펜션도 이에 맞춰 좀더 부드럽게 세팅된다.
온로드 주행 성능은 여전했다.
배기량 1,341cc의 E-Turbo 엔진은 최고출력 156마력, 최대토크 24.1kg.m의 동력성능을 보유했지만 체감하는 토크는 분명 수치 이상이다. 작은 엔진이지만 가속시 쏟아내는 엔진음은 사이즈를 능가한다. 여기에는 약간 ‘귀 속임’(?)이 있다. 천장 네 귀퉁이에 설치된 마이크로폰이 외부 소음을 받아 이를 상쇄시켜 주는 전파를 쏘는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ANC)이 작동한다.
트레일블레이저에는 설계 단계부터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활용해 차체에 하중이 실리는 부분은 보강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무게를 덜어내는, GM의 첨단 설계 프로세스 ‘스마트 엔지니어링’ 기술이 들어갔다. 작은 엔진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재주를 지녔다는 얘기다. 1.35리터 첨단 라이트사이징(Rightsizing) 가솔린 E-Turbo 엔진은 2리터 자연흡기 엔진에 맞먹는 파워를 쏟아낸다.
전륜구동 모델에는 효율을 극대화하는 VT40 무단변속기가 탑재돼 12.9km/L(17인치 타이어 기준)의 복합연비를 실현했으며, 사륜구동 모델에는 하이드라매틱 9단 자동변속기가 매칭돼 11.6km/L(18인치 타이어 기준)의 준수한 복합연비를 낸다.
3종 저공해 차량 인증을 받아 공영 주차장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지혜로운 살림꾼이다.
반 자율주행을 실현하는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은 정차와 재출발까지 잘 작동하지만 도로 중앙을 달리도록 보조하는 기능은 여전히 빠져 있다. GM 관계자는 “GM의 정책상 슈퍼크루즈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이 기능이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한다. 완전 자율주행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운전의 안전책임은 운전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게 GM의 법무정책 고집이다.
이번 페이스리프트에는 내외장 디자인에도 변화가 있다.
전면부 라디에이터 그릴의 상단과 하단을 가로지르는 크롬 그릴바는 한층 두툼하게 디자인돼 강인한 인상을 주며, 상단의 LED 주간주행등은 이전보다 얇아져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LED 프로젝션 헤드램프는 기본사양이 되었다.
인테리어 디자인은 외관보다 더 크게 바뀌었다.
인스트루먼트 패널이 변화의 핵인데, 기존 듀얼 콕핏 디자인에서 드라이버 포커스 디자인으로 대대적인 레이아웃 변화가 일어났다. 8인치의 컬러 클러스터가 운전자에게 직관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좌우 좌석의 중앙에는 11인치의 컬러 터치스크린을 배치했다. 화면은 모두 운전자 쪽을 향하도록 했다.
중앙 송풍구와 비상버튼은 중앙 터치스크린 하단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인테리어에 다양한 소재와 그래픽을 사용해 유니크한 가치를 만들었다.
트림별 특화 디자인 전략도 유지된다. 기본형 모델과 별개로 개성과 라이프스타일을 디자인에 반영한 ‘RS’와 ‘ACTIV’ 트림을 운영한다. 랠리 스포츠(Rally Sport)의 앞 글자를 딴 RS 트림은 스포티한 매력을 강조했고, ACTIV 트림은 아웃도어 액티비티에 최적화된 구성을 했다.
더 뉴 트레일블레이저의 가격은 LT 2,699만 원, Premier 2,799만 원, ACTIV 3,099만 원, RS 3,099만 원이다.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