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란트라는 종목으로 또 하나의 e스포츠 생태계를 그리고 있는 라이엇게임즈의 글로벌 구상은 원시 거대대륙 ‘판게아’로 통한다. 지금은 아메리카 대륙과 유라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쪼개져 있지만 원시 지구는 ’판게아’라는 거대한 하나의 땅덩어리였다.
2023년 초 라이엇게임즈는 발로란트의 e스포츠 생태계를 재편했다.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남아시아를 포함하는 퍼시픽 권역과, 미주의 아메리카스 권역, 유럽 중동 아프리카의 EMEA 권역으로 삼분했다. 나눈 것으로 끝이 아니다. 각 권역의 맹주들을 한 자리에 모아 자웅을 가리게 하는 상위 경쟁 구도를 하나 더 그렸다. 발로란트 챔피언스 투어, 즉 VCT는 ‘판게아’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세상 위에 더 큰 세상이 존재하는 생태계다.
25일 막을 내린 ‘발로란트 마스터스 도쿄’가 좋은 본보기다.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 권역의 리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야 한다. 각 국제 리그에서 1위를 차지한 3개 팀은 곧바로 마스터스로 가는 더블 엘리미네이션 대진에 직행했고, 3~4월의 브라질 상파울로 국제대회인 LOCK//IN에서 EMEA가 승리(프나틱 우승)했으므로 EMEA 2번 시드 팀에도 추가 진출권을 부여했다. EMEA리그에서는 1위팀 ‘팀 리퀴드’와 ‘프나틱’이 그 혜택을 받았다.
‘발로란트 마스터스 도쿄’에 참가하는 12개 팀 중 남은 8개팀은 2개조의 그룹 스테이지에 배치 돼 더블 엘리미네이션 방식으로 결승 고지를 향해 한발한발 올라가야 했다. 이 모든 행보가 25일에 열린 마지막 승부 ‘발로란트 마스터스 도쿄 결승전’을 향했다. 그런데 이 또한 종착지가 아니다. 오늘 8월,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글로벌 강자들이 경합하는 ‘발로란트 챔피언스’를 바라봐야 한다.
이 같은 생태계는 라이엇게임즈의 e스포츠 맹주, LOL에서 이미 익숙해진 모습이다. LOL에서 축적한 경험이 ‘발로란트 e스포츠’에 그대로 접목됐다.
라이엇게임즈는 이번 ‘발로란트 마스터스 도쿄’에서 커다란 가능성을 발견했다.
대회 도중 한국 취재진과 간담회 기회를 만든 오상헌 라이엇게임즈 아시아태평양 e스포츠 총괄은 “도쿄 마스터스에 일본을 대표하는 제타 디비전이 떨어져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결승진출전과 결승전을 보면서 그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제타는 떨어졌지만, 같은 퍼시픽 권역팀인 DRX를 홈팀처럼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발로란트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결승 진출전과 결승전이 열린 마쿠하리 멧세(지바현 국제 전시장)는 일본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연일 관람객으로 장사진을 쳤다. 8,000석의 좌석은 빈틈없이 들어찼고, 관객들은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크게 반응했다. 팀 응원에서는 퍼시픽 권역 팀을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결승 진출전에서 이블 지니어스를 상대한 페이퍼 렉스(PRX, 싱가포르)는 퍼시픽 리그 소속이라는 이유로 도쿄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오상헌 아시아태평양 e스포츠 총괄은 “대륙별 단위로 운영하면서 라이엇게임즈 내 조직도 크게 바뀌었고 마인드도 권역 단위로 커졌다. 아태권역에서는 어떤 팀이 국제대회에 나가도 국가를 넘어 권역별로 응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팬들을 통합해야 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가능할까 걱정도 있었지만 오늘 현장을 보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발로란트 e스포츠가 빠르게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역시 LOL에서 쌓은 노하우가 바탕이 됐다. 오 총괄은 “발로란트가 LOL 팬들을 흡수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주변에서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두 게임은 유저층과 팬층이 많이 다르다. 발로란트가 좀더 어린 세대에 어필하고 있지만 충분히 다른 성격으로 두 개의 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LOL에서 축적한 경험으로 발로란트 생태계를 빠르고 튼실하게 조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롤 이상의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를 일본에서 개최하면서 얻은 성과도 컸다.
오상헌 총괄은 “e스포츠 불모지였던 일본에서 e스포츠에 대한 믿음을 얻었다는 게 가장 큰 성과다. 물론 일본에서 발로란트 열기가 뜨거운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게임 출시 초기 일본 커뮤니티에서 호평을 받아 화제가 됐고, 출시 당시 유명 스트리머가 발로란트를 즐기면서 다른 유저들에게도 빠르게 전파됐다. 또한 제타 디비전이 국제대회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일본 팬들에게 엄청난 임팩트로 작용했다. 당시 제타의 성과는 일본 공영방송에서 뉴스로 다뤄질 정도였다. 일본이 발로란트의 새로운 성지로 거듭난 모습에 영감을 받아 마스터스 대회 장소로 낙점하게 됐다”고 했다.
발로란트 마스터스의 흥행 성공을 지켜보면서 한국에서의 열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오상헌 총괄은 “한국에서는 좀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분명히 한국에서도 발로란트 유저는 많이 있다.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퍼시픽 리그의 허브를 한국에 정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의 발로란트 열기는 한중일 삼국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오상헌 라이엇게임즈 아시아태평양 e스포츠 총괄은 “모든 스포츠에서 한일전은 최고의 흥행카드다. 발로란트를 통해 e스포츠에서도 빅 카드 성사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중국까지 포함한다면 한중일 삼각구도가 형성된다. 이를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논의 중이다”고 말했다.
현재 발로란트의 아시아 퍼시픽 권역에 중국은 없다. 오상헌 총괄은 “중국 내 e스포츠 개설도 곧 논의될 것이지만 퍼시픽 리그에 중국이 포함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인했다.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