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 삼국시대 오의 명장이었던 주유는 대단한 전략가였다. 삼국이 자웅을 겨룬 적벽대전에서, 천하를 집어삼킬 듯 위세를 떨치던 조조에게 처참한 패배의 쓴맛을 안긴 뛰어난 장수다. 주유가 운용한 고육계(苦肉計)-사항계(詐降計)-연환계(連環計)에 제갈량의 신묘한 동남풍이 어우러지면서, 조조가 진두지휘한 위의 수십만 대군은 하릴없이 스러지며 적벽을 피로 물들였다.
그러나 시대를 잘못 만난 주유였다. 같은 시대에, 더 빼어난 책략가였던 제갈량의 존재에 부딪힌 주유는 마음속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1,100여 년이 흐른 뒤, 나관중은 희대의 걸작인 『삼국지 연의』에, 주유가 평천하의 웅지를 끝내 이루지 못하고 죽으며 남긴 한탄의 일성을 담아냈다. “오, 하늘이시여! 저를 세상에 내보내며 어찌하여 공명(제갈량의 자)까지 태어나게 하셨나이까?”
다시 7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만약 해리 케인(30·토트넘 홋스퍼)이 『삼국지 연의』를 읽었다면 똑같은 한탄을 토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 하늘이시여! 저를 세상에 내보내며 어찌하여 (엘링) 홀란까지 태어나게 하셨나이까?”
토트넘 세 서포터스 클럽, 케인을 한결같이 2022-2023시즌 선수로 꼽으며 위로
2022-2023시즌, 케인은 불운했다. 프로 무대에 데뷔한 2010-2011시즌 이래 한 손가락으로 손꼽을 만한 뛰어난 성적을 올렸으나, 웃을 수 없었다. 이번 시즌에, 혜성같이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에 나타난 ‘괴물’ 엘링 홀란(23·맨체스터 시티)이 내뿜은 강렬한 빛에 가려 ‘퇴색의 운명’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에, 48경기에 모습을 나타낸 케인은 토트넘 옷을 입고 모두 30골(20일 현재·이하 현지 일자)을 터뜨렸다. EPL에서 28골을, UEFA 챔피언스리그(UCL)에서 1골을, FA컵에서 1골을 각각 뽑아냈다.
커리어 다섯 번째로, 케인은 단일 시즌 30골 고지를 밟았다. 2014-2015시즌(51경기-31골), 2016-2017시즌(38-35), 2017-2018시즌(48-41), 2020-2021시즌(49-33)에 단일 시즌 30골 클럽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특히, 이번 시즌 EPL에서 작렬한 28골은 득점왕에 올랐던 두 차례 시즌(2025-2016·25골, 2020-2021·23골)보다도 더 많은 골 수확이었다. 케인은 세 차례 시즌(2015-2016, 2016-2017, 2020-2021) EPL 골든부트를 안은 바 있다.
그러나,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장벽’이 케인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EPL로 활동 터전을 옮긴 홀란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강풍을 일으켰다. 38경기 체제(32골)는 두말할 나위 없었고 42경기 시스템(34골)마저도 무너뜨리는 ‘골 폭풍(36골)’으로 EPL을 강타했다. 아직 맨체스터 시티가 3경기를 남겨 놓고 있어, 이번 시즌이 끝날 때 자신의 기록을 경신할 가능성이 무척 크다. EPL 데뷔 시즌 최다 득점 기록도 경신해 가는 홀란이다.
케인의 우승에 맺힌 한은 또 시즌을 넘기게 됐다. 케인은 이제껏 정상을 단 한 번도 밟지 못했다. EPL에선, 준우승 마당에도 들어서지 못했다. 고작 UCL에서 한 차례(2018-2019시즌), EFL컵에서 두 차례(2014-2015, 2020-2021시즌) 각기 준우승했을 뿐이다. 그야말로 ‘비운의 골잡이’인 케인이다.
그래도 기록 측면에서, 케인은 돋보이는 발자취를 남겼다. 우승의 한을 다소나마 씻어 낼 수 있는 인상 깊은 활약을 펼쳤다.
먼저, 한 시즌 최다 경기(25) 득점 고지를 정복했다. 지난 20일 브렌트퍼드와 맞붙은 이번 시즌 37차전(1-3 패배)에서, 케인은 선제골을 넣으며 새 지평을 열었다. 1주일 전인 13일, 애스턴 빌라와 상대한 36차전(1-2패)에서 만회골을 넣으며 모하메드 살라(31·리버풀)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이제 한 걸음 더 앞서 나갔다.
또한 이 골로, 자신이 지닌 단일 클럽 EPL 최다 득점 기록도 더 늘렸다. 2013-2014시즌 토트넘에서 첫 골을 뽑아낸 이래 둥지를 옮기지 않고 줄곧 홋스퍼만을 위해 열정을 불태워 온 케인에게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값진 기록이다. 211골! 이 ‘소중한’ 기록 때문에, 케인이 이번 시즌이 끝나더라도 무성한 이적설과 달리 토트넘에서 계속 뛰리라는 예상이 나올 정도다.
모든 대회를 통틀어, 케인은 토트넘 최다 득점자로도 우뚝 서 있다. 지난 2월 일찌감치 지미 그리브스의 기록(266골)을 깨뜨리고 자신과 싸우고 있는 케인이 토트넘에 바친 득점은 278골에 이른다.
이런 케인에게, 토트넘 팬들은 열광하며 걸맞은 상으로 ‘예우’하고 위로했다. 토트넘을 응원하는 세 개의 서포터스 클럽은 한결같이 케인을 홋스퍼 2022-2023시즌 선수로 선정하고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EPL도 케인을 2022-2023시즌 선수 후보로 지명했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