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V리그 남자부 역사에 ‘왕조’라고 부를 수 있는 팀은 삼성화재가 유일했다. 실업배구시절 최강팀이었던 삼성화재는 2011-20212시즌부터 2013-2014시즌까지 V리그 최초 통합 3연패는 물론 2007-2008시즌부터 7시즌 연속 챔피언 결정전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금자탑을 세웠다.
그리고 약 10년이 지난 현재, V리그에는 또 하나의 왕조가 탄생했다. 대한항공은 3일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2022-2023 도드람 V리그’ 남자부 현대캐피탈과의 챔피언결정전 3차전에서 풀세트 접전 끝에 3-2로 승리, 3전 전승으로 왕좌에 올랐다. 지난 2020-2021시즌부터 3시즌 연속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삼성화재 이후 두 번째 통합 3연패 팀이 탄생했다.
대한항공은 해외 무대에서 잔뼈가 굵고 경험을 쌓은 박기원 감독을 선임하면서 세계의 배구 트렌드를 한국에서 선도하기 시작했다. ‘스피드 배구’로 V리그에 새바람을 몰고 왔고 이후 로베르토 신탈리,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이 부임한 뒤에도 이러한 기틀은 유지됐다. 결국 신탈리, 틸리카이넨 체제에서 대한항공은 통합 3연패를 달성했다. 대한항공은 V리그의 트렌드세터였다.
박기원 감독부터 시작해서 신탈리 감독이 꽃 피우고 틸리카이넨 감독이 만개시킨 대한항공의 왕조 역사다. 그리고 이 역사의 중심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선수가 바로 세터 한선수(38)다. 지난 2007-2008시즌에 데뷔한 한선수는 삼성화재의 왕조를 지켜봤고 왕조의 힘 앞에서 좌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아픔과 좌절의 역사는 한선수를 성숙하게 만들었고 대한민국 최고의 세터이자 ‘항공 왕조’의 중심에 우뚝 섰다.
한선수는 이번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위기 관리 능력을 발휘하면서 리더 기질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안정적인 토스워크로 링컨 윌리엄스, 정지석의 공격을 주도한 것은 물론 기교가 섞인 서브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지난 3일 열린 3차전, 대한항공은 세트스코어 0-2로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3세트 중반 한선수의 서브로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대역전극의 서막을 알렸다. 아울러 현대캐피탈이 강서브로 대한항공의 리시브를 흔들었지만 한선수가 종횡무진 누비면서 이를 정확한 세트로 연결시켰다.
지난 2017-2018시즌 이후 개인 통산 두 번째 챔피언결정전 MVP를 차지한 것은 당연했다. 챔피언결정전 3차전 17득점을 올린 아웃사이드 히터 정지석은 “(한)선수 형이 고생을 많이 했다. 현대캐피탈에서 저희를 힘들게 하려고 서브를 강하게 때리고 리시브를 흔들었는데 그것을 러닝 세트로 원블로킹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라면서 한선수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경의를 표했다.
데뷔 16년차. 혹자는 ‘언제적 한선수’라고 할 수도 있지만 대한항공의 배구, 그리고 대한민국의 배구의 여전한 최고의 세터는 한선수다. 여전히 대체불가이고 한선수에 버금가는 잠재력을 가진 세터도 찾기 힘들다. 리빌딩 기조의 현대캐피탈이 김명관을 중심으로 팀을 재편했고 한선수의 대한항공에 맞서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명세터 출신이자 앞서 삼성화재 왕조의 시작을 함께했던 최태웅 현대캐피탈 감독은 챔피언결정전 이후 한선수에 대해 “팀의 중심을 잘 잡는 모습을 보면서 국내 최고의 세터라는 생각을 했다”라고 칭찬했다.
이제 왕조의 중심에 선 대한항공이고 ‘항공 왕조’라고 불리는 V리그의 새 역사를 창조했다. 그 중심을 한선수가 이끌고 있고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선수는 “이제 선수생활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다. 지금은 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라면서 “42세까지 열심히 하고 그때까지 전성기로 남을 수 있도록 해보겠다. 그리고 최초의 통합 4연패 욕심도 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왕조의 중심에서 최초의 역사까지 외친 한선수. 한선수를 향해 ‘G.O.A.T’의 칭호를 붙이는 것은 이제 어색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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