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가수 양희은 씨의 코맹맹한 호통이 들린다. “너 이름이 뭐니?”
당찬 그녀가 이 차를 봤으면 이렇게 물었을 법하다. “너 정체가 뭐니?”
쉐보레 글로벌 모델로 야심차게 준비한 ‘트랙스 크로스오버(TRAX CROSSOVER)’가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많은 요소들이 파격이다. 디자인부터 주행질감, 편의사양까지 상품성을 판정하는 모든 요소들이 기대 이상이다.
제원부터가 어리둥절하다.
트랙스 크로스오버의 소개자료에는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의 글로벌 제품 포트폴리오에서 쉐보레의 엔트리 모델’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다.
GM 한국사업장의 위상을 높이고 있는 또 하나의 모델, ‘트레일블레이저’는 트랙스 크로스오버 보다 상위 모델이다. 트레일블레이저의 전장은 4,410~4,425mm이고, 실내 공간을 결정짓는 휠베이스는 2,640mm다. 당황스럽게도 트랙스 크로스오버의 전장은 4,540mm이고 휠베이스는 2,700mm다. 수치가 하극상이다. 전통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항거일까?
뿌리가 달라서다. 트레일블레이저는 작지만 엄연한 SUV이고, 트랙스 크로스오버는 이름 그대로 크로스오버이다. 세단의 편안함과 SUV의 실용성을 다 갖춘 게 크로스오버다. SUV가 낮아져서 이 녀석이 되기도 하고, 세단이 높아져서 이 녀석이 되기도 한다. 트랙스 크로스오버는 후자의 성격이 강하다.
단종된 준중형 세단 쉐보레 크루즈가 생각난다. 크루즈는 전장이 4,666mm, 휠베이스가 2,700mm다. 트랙스 크로스오버와 축거가 같다. 정리가 좀 된다. 트랙스 크로스오버는 키가 커진 크루즈인가 보다.
주행도 그랬다. 세단 같이 정숙하고 안정적이다. 실내의 정숙성은 ‘엔트리’ 차급을 붙이기가 미안할 정도다. 2중 접합 윈드실드 사이에 필름을 넣어 외부 소음을 줄인 ‘어쿠스틱 윈드실드’가 전면 창에 끼워졌고, 반대 파동을 쏘아 소음을 줄여주는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ANC)까지 들어갔으니, 차급을 뛰어넘는 정숙성으로 평가될 만했다.
트랙스 크로스오버의 다운사이징 엔진도 놀랄 노 자다.
트레일블레이저에서 이미 한 번 놀란 마음이지만, 트랙스 크로스오버에서 또 놀랐다. 이번 엔진은 트레일블레이저보다 더 작은 3기통 1.2리터 E-Turbo Prime 엔진이다. 이 작은 녀석이 최고출력 139마력, 최대 토크 22.4kg.m을 낸다. 22.4kg.m의 토크는 웬만한 2.0리터 자연흡기 엔진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고양시 킨텍스에서 파주로 가는 자유로를 달리는데, 거침이 없다. 저속에서 치고 나가는 모습이나, 고속에서 추가 동력을 얻어가는 과정에서도 이 게 1.2리터짜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기운이 넘친다. 저배기량 엔진이 숨이 찰 때 내는 찢어지는 소리도 없다. GENⅢ 6단 자동변속기가 고급스럽게 매끄럽지는 않지만, 높아지는 토크를 툭툭 받아주는 모습이 오히려 역동적이다. 리터당 12.7km(17인치 모델 기준)의 연비로 제3종 저공해차 인증까지 받아주니 고맙기도 하다.
차체가 높은 크로스오버임을 까맣게 잊고 내달리다가 정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면 스탠스가 듬직하다.
랠리 스포츠(Rally Sport)를 의미하는 RS트림은 19인치 카본 플래시 머신드 알로이 휠을 달고 있다. SUV급의 휠하우스와 어울려 존재감을 높인다. 아웃도어 활동에 특화된 ACTIV 트림도 충분히 근육질이다. 18인치 글로스 블랙 알로이 휠이 세단에서 찾을 수 없는 자부심을 준다.
안정적 주행의 원천에는 최신 바디 스트럭처가 숨어 있다. 트랙스 크로스오버에는 GM의 최신 설계 프로세스인 ‘스마트 엔지니어링’이 적용됐다고 한다. 다양한 주행상황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구현해 하중이 실리는 부위를 보강하고 그렇지 않은 부위는 무게를 덜어내는 설계 방식이다. ‘스마트 엔지니어링’으로 탄생한 고강성 경량차체는 운동성능은 물론이고, 연비와 안정성, 내구성까지 높이는 효과를 준다.
최신 인포테인먼트 시스템과 다양한 편의 안전 사양도 따질 만하다. 무선 폰 프로젝션 방식의 안드로이드 오토 및 애플 카플레이는 스마트폰의 똑똑함을 차 안으로 이어준다. 엔트리 모델에서 찾아보기 힘든 11인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익숙한 스마트 기기처럼 마음에 달라붙는다.
힐스타트 어시스트 기능을 지원하는 StabiliTrak® 차체 자세 제어 시스템, 스탑&고가 가능한 어댑티브 크루즈, 전방충돌 경고시스템과 저속 자동 긴급 제동시스템, 차선이탈 경고와 차선유지 보조시스템, 전방 보행자 감지와 제동시스템, 차선 변경 및 사각지대 경고 시스템, 후측방 경고 시스템 등이 든든하게 안전 운전을 지원한다.
트랙스 크로스오버는 생산지인 한국 시장을 위해 특화 옵션도 넣었다. 쉐보레의 글로벌 모델 중 최초로 오토 홀드 기능이 탑재됐다. 우리나라 도심의 흔한 정체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장치다. 파워 리프트게이트는 트렁크를 열고 닫을 때 과한 힘을 쓸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운전자가 특히 많이 따진다는 LED 테일램프와 LED 방향지시등 일체형 아웃사이드 미러, 샤크핀 안테나도 한국 시장 특화 옵션이다.
이렇게 따져보니 트랙스 크로스오버가 엔트리 모델 이상의 상품성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위 모델인 트레일블레이저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있다. 트레일블레이저 엔진의 배기량(1.3리터)과 성능(156마력, 24.1kg.m)에 미치지 못하고, 트레일블레이저에는 있는 사륜구동 옵션이 트랙스 크로스오버에는 아예 없다. 형과 동생의 차별화는 사이즈가 아니라 성능에 있었다.
기대 이상의 성능도 성능이지만, 소비자를 유혹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가격 경쟁력이다. 주력인 ACTIV가 2,681만 원, RS가 2,739만 원이긴 하지만 2,052 만 원짜리 LS, 2,366만 원짜리 LT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청춘들에겐 더 없이 반가운 선택지다.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