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의 2023년 최대 야심작, EV9이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순수 전기 에너지로 구동되는 국내 최초의 대형 SUV인지라 국내외 자동차 애호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차다.
국내 자동차업계를 출입하는 기자들에게 실차의 모습을 보여주는 ‘미디어 프리뷰’는 이미 2월 17일 있었지만, 글로벌 엠바고가 걸린 터라 기사로 쓸 수 있는 제한은 3월 15일에야 풀리기 시작했다.
EV9은 E-GMP 플랫폼을 기반으로 개발된 기아의 두 번째 순수 전기차 모델이다. 크로스오버 형태의 EV6가 첫 모델이고, 두 번째는 요즘 대세인 대형 SUV의 모습으로 탄생했다.
실차로 만나본 EV9은 대단한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외부 디자인의 뼈대는 작년 7월 부산 모터쇼에서 공개된 ‘EV9 콘셉트’와 꽤 많이 닮아 있었다. 실내는 자율주행이 되는 미래상을 구현한 ‘EV9 콘셉트’와는 거리가 있었다.
EV9의 뛰어난 조형미는 대형차를 대형차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재주를 부렸다. 그 재주는 측면 디자인에서 두드러진다.
측면은 두 개의 입체적 삼각형과 낮게 배치된 벨트라인으로 대별된다. 중소형차의 벨트라인은 차를 실제보다 커 보이게 하고 역동성을 강조하기 위해 헤드라이트에서 후미등까지 한 줄로 죽 잇는 형태가 많다. 그러나 EV9의 벨트라인은 A필러와 C필러에서 뚝 끊어진다. 끊어지는 지점에는 입체적인 삼각형이 자리잡고 있다. 산맥이 내달리다 정점을 만들고 곧바로 평야지대로 이어지는 형상이다.
편편한 평야지대를 내려가다 보면 완만한 구릉이 생기는데, 그 구릉은 앞뒤 문짝 위에 두툼하게 자리잡는다. 이 구릉은 나지막이 자리잡은 벨트라인이 되면서, 차를 커 보이지 않게 하는 구실을 한다. 입체적으로 돌출한 앞뒤 산맥을 평탄하게 엮어주는 완사면이다.
헤드라이트와 후미등의 디자인도 인상적이다. 기아디자인센터장인 카림 하비브 부사장은 “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됐다”고 배경 설명을 한다. 세 개의 직선이 3차원의 공간에 떠다니는 모습이다. 만물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 천지인의 동양적 세계관이 엿보인다. 땅과 하늘, 그사이에 있는 인간이 서로를 희롱하며 만들어 낼 수 있는 조형은 무궁무진하다. 후미등도 마찬가지다. 세 개의 어긋난 선은 삼방향으로 뻗어 넓은 후미에 심심하지 않게 입체적 무늬를 만들어 낸다.
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전면부에는 기아 디자인의 헤리티지인 호랑이코(타이거 노즈)가 진화한 형태로 자리잡았다. 내연기관차의 호랑이코가 구멍이 숭숭한 그릴 디자인으로 표출됐다면 전기차의 호랑이코는 하얗고 편편한 판으로 표현됐다. 라디에이터가 필요 없는 전기차라고 전면부를 마스크 쓴 모습으로 디자인하던 때도 있었다. EV9은 마스크의 답답함을 피하기 위해 아래위로 숨구멍을 뚫었다. 그랬더니 호랑이코가 더 잘 보인다. 좌우에서 춤추는 듯한 헤드라이트 디자인은 호랑이코가 숨쉬는 효과를 낸다.
카림 하비브 부사장은 기아디자인센터장인 카림 하비브 부사장은 EV9 디자인을 설명하면서 “기아의 디자인 철학인 ‘OPPOSITES UNITED’ 즉, 상반된 개념의 창의적 융합이 EV9 디자인에도 속속들이 적용됐다. 이 철학은 대조의 미를 표현하는 개념인데, 서로 잘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합쳐졌을 때 굉장한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조합이 있다. 이런 대비되는 아름다움은 풍성한 창의력으로 발현되는데, 그 풍성함이 기아 디자인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분히 추상적인 말이지만 EV9이 풍기고 있는 디자인 언어와 묘하게 매칭이 되기도 한다. 다행히 좀더 쉬운 말도 했다.
하비브 부사장은 “기아 디자인은 한국의 문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서울이 가지고 있는 역동적인 문화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의 한국 문화, 그 중에서도 서울의 문화는 미래중심적이면서도 선구자적이다. 최근에 굉장히 많은 글로벌 트렌드들이 한국 문화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기아도 이런 흐름에 발맞춰 한국의 다양한 문화들을 저희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해석해 세계로 내보내고 있다”고 했다.
하비브 부사장의 말을 종합하면 EV9의 디자인은 한국 문화에서 파생한 상반된 요소들을 융화시켜 풍성한 아름다움으로 탄생시킨 결과물이다. 한국 문화를 설명하면서 제시한 단어도 재미 있다. 바로 ‘모던 팝’이다. 하비브 부사장이 해석한 모던 팝은 낙관주의에 기반한 긍정적 에너지다. 기아 디자인에서 녹여내고자 하는 메시지도 바로 서울 시내의 역동성과 활기찬 에너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던함과 전통이 조화롭게 녹아 있는 서울은 그의 눈에는 대조적인 아름다움이 풍성하게 녹아 있는 생기 넘치는 도시이다.
이렇게 예술적 상상력을 펼치던 EV9도 실내로 들어가면 급격히 현실과 타협한다. ‘EV9 콘셉트’에서 만났던 응접실 세트 같은 시트는 온데간데없고, 내연기관차에서 흔히 보던 현실의 시트가 3열 7인석으로 자리잡고 있다.
외관 디자인이 일부러 차를 작아 보이게 했다면, 실내 디자인은 드넓은 공간성을 마음껏 자랑하고 있다. E-GMP의 장점을 원 없이 발휘했다. EV9의 전장(4,930mm)은 현대차 팰리세이드(4,995mm) 보다 짧지만 실내 공간의 크기를 좌우하는 휠베이스는 무려 20cm나 길다(EV9 3,100mm, 펠리세이드 2,900mm).
트렁크 공간을 고정적으로 빼놓았음에도 불구하고, 3열에 앉아도 크게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공간이 확보된다.
미디어 프리뷰에 함께한 기아 넥스트디자인 담당 김택균 상무는 “내연기관 차량보다 전용 EV는 공간감이 훨씬 더 확장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EV9은 기아 Plan S 라인업 중에서 공간감이 정점에 닿아 있는 차종이다. 그런 공간감은 외장 디자인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는데, 윈드실드에서부터 사이드 글라스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C필러 바로 앞에 있는 쿼터 글라스도 사이즈가 굉장히 크게 들어가 있다. 벨트라인도 기존의 SUV 디자인을 할 때보다 낮게 세팅 돼 탑승자가 안에 앉았을 때도 시원하게 틘 오픈 뷰를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기아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인 타이거 페이스 디자인에 대해서는 “EV9에서 타이거 페이스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다. 저희가 더블 캡이라고 부르는 어퍼 캡, 로우 캡과 함께 메탈 가니시 등 그래픽적인 요소를 통해 타이거 페이스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요소들이 수직 형태의 헤드램프 그래픽과 하나로 통합돼 연결성 있고 모던하게 표현됐다”고 말했다.
내장 디자인을 맡은 기아 넥스트디자인내장팀의 이민영 팀장은 “E-GMP 플랫폼이라 다양한 사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갔다. 중앙부 콘솔을 독립형으로 설계한 것도 E-GMP 플랫폼의 공간 활용성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센터 가니시에 있는 장치들은 시동이 켜지기 전에는 깨끗한 하나의 면으로만 보이게 했다. 기본적으로 히든 터치 타입으로 되어 있지만 감압식 센서를 적용해 여러 기능이 들어가도 사용성에 문제가 없도록 했다. 볼륨, 공조 버튼 등 자주 쓰는 스위치는 기존의 물리 버튼을 그대로 남겨둬서 운전 중에는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기존의 물리버튼은 상당수가 도어와 센터 대시보드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EV9의 디자인은 사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에게도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었다. 카림 하비브 부사장은 “EV로서는 이처럼 큰 공간감을 확보한 건 거의 최초일 것이다”고 말했고, 이민영 팀장도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에게는 기존에 보지 못했던 굉장히 큰 스케치북을 받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는 근본으로 돌아가면 의외로 빠르게 답을 찾을 수 있다. 김택균 상무의 말에서 그런 깨우침이 느껴진다. 김 상무는 “기존의 자동차 디자인이 기계적인 파워풀함을 강조했다면, 전용 전기차로 넘어가는 시대에서는 인간의 삶을 좀 더 증진시켜줄 수 있는, 인간 중심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디자인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옳다 싶었다. 고객들이 이 차를 봤을 때 SUV의 강인함을 느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해 보이기를 원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모던함을 강조하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고 말했다.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