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에서, 백전백승의 상승군(常勝軍)이 가능할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예로부터 회자한 “이기고 짐은 병가에서 일상적 일이다[勝敗兵家之常事·승패병가지상사]”라는 병학의 금언도 있지 않는가. 한때 통천하의 기세를 뽐냈던 초패왕 항우도 그러했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고 호언했던 그였건만, 한신의 사면초가(四面楚歌)에 휘말려 일패도지의 나락으로 떨어져 자진의 길을 걸었다.
현대 스포츠는 승부의 세계다. 특히, 프로 스포츠는 더하다. 우승자가 독식하는 약육강식의 철칙만이 존재한다. 이 맥락에서, 스포츠와 전쟁은 맥이 통한다. “그라운드 또는 코트는 전장의 압축판이다.”라는 표현이 통용되는 배경이다. 그만큼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마당이 스포츠 세계다.
스포츠에서, 감독은 곧잘 장수로 비견된다. 그런데 감독의 수명은 장수만 못 한 현실이다. 승패에 연연한 구단의 칼바람 앞에서, 감독은 곧잘 희생양으로 전락하기 일쑤다. 더구나, 시즌 중임에도 감독 교체의 극약 처방전을 꺼내 드는 구단이 적지 않다.
절대 왕정 시절에도 군주는 “물을 건널 때는 말을 갈아타지 않는다.”라며 웬만하면 전쟁 중에 장수를 교체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오죽하면 “감독이라면 언제든지 독약이 든 성배의 운명에 맞닥뜨릴 수 있음을 머릿속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중도 퇴진도 서러운데 최단기간 감독 명부에 이름이 올라가다니…
“감독, 곧 바람 앞의 등불이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2022-2023시즌을 보면 절로 토해지는 말이다. 시즌이 반환점을 넘어선 13일(이하 현지 일자) 현재, 8개 구단이 단행한 감독 교체 강수는 할 말을 잃게 한다.
그중 사우샘프턴은 압권(?)이다. 두 번씩이나 사령탑을 갈아 치웠다. 1차 감독 교체는 지난해 11월 있었다. 그달 7일 랄프 하젠휘틀 감독을 퇴진시키고 사흘 뒤(10일) 네이선 존스를 새로 사령탑에 앉혔다. 그 존스 감독마저도 독이 든 성배의 운명을 피해 가지 못했다. 지난 12일 중도 퇴진의 멍에를 메고 물러났다.
존스 감독은 지난 12일 홈(세인트 메리스 스타디움)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전 패배(1-2) 뒤 사령탑에서 내려왔다. 구단은 1명(마리오 레미나)이 퇴장당해 10이 뛴 팀에 져 무척 화가 났던 모양인지 참고 있던 칼을 내리쳤다.
이번 시즌 감독 교체 단초는 AFC 본머스가 열었다. 지난해 8월 30일, 스콧 파커를 게리 오닐로 경질했다. 감독 대행으로 사령탑에 앉은 오닐은 11월 27일 정식 감독으로 승격했다.
감독 교체는 강등의 기로에 내몰린 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투자만큼 성적이 뒤따르지 않으면 철퇴가 뒤따랐다. 부자 구단인 첼시가 중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사령탑 교체 카드를 내민 게 대표적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9월 7일 토마스 투헬 감독이 물러나고, 곧바로 이튿날 그레이엄 포터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불명예 퇴진한 네이선 존스 감독은 치욕적 기록까지 감수해야 해 더욱 비감한 처지에 내몰린 꼴이다. EPL로 옷을 갈아입고 새로 출범한 1992년 이후 여섯 번째 최단기간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으니, 괴로운 심정이 어떠했을지 눈앞에 그려진다(표 참조).
이 부문에서, 역대 가장 짧게 지휘봉을 잡았던 인물은 레스 리드 전 찰턴 애슬레틱 감독이다. 리드 전 감독이 사령탑에 앉았던 기간은 고작 40일이다. 이 기간에, 리드 감독은 7경기에서 승점 4점을 얻는 데 그쳤다.
승점 면에서 최악이었던 인물은 프랑크 더 부르 전 크리스털 팰리스 감독이다. 77일간 팀을 이끌고 4경기를 치르며 승점을 단 1점도 따내지 못했다. 94일간 지휘봉을 잡았던 존스 감독은 8경기에서 승점 3점을 올렸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시즌 중 사령탑 교체는 충격요법이다. 약효가 주효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자칫 잦은 교체의 악순환 고리에 빠져드는 부작용이 일 수도 있다. 물론, 감독 교체는 구단의 전권이라고 해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세계적 명장인 위르겐 클로프 감독도 중도 취임한 첫 시즌에 쉽사리 자신의 색깔을 내지 못했다. 클로프 감독이 PL에서 명성에 걸맞은 업적을 내는 데엔 다섯 시즌이 필요했다. 2014-2015시즌 6위였던 리버풀은 클로프 체제 1막인 2015-2016시즌 오히려 8위로 추락했다. 두 시즌(2016-2017~2017-2018) 연속 4위와 2018-2019시즌 2위를 거쳐 비로소 5막인 2019-2020시즌에서야 비로소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위기에 영웅이 나오듯, 명장도 좋은 때를 만나야 잠재력을 한껏 분출할 수 있다. 씨앗을 뿌려야 결실할 수 있듯, 여건을 조성한 뒤 감독의 역량을 기대해야 하지 않겠나. “투자 없는 성적은 있을 리 없다.” 스포츠계의 한결같은 금과옥조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