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홍윤표 선임기자] 1909년 일본군의 ‘남한 폭도대토벌’ 작전에 끝까지 항전하다 체포된 호남 의병장(湖南義兵長) 16명이 처형당하기 전에 찍힌 원본 사진 한 장이 114년 만에 발견됐다.
서지연구가 문승묵 씨가 최근 입수, 공개한 이 사진은 1910년 4월 5일 일본 도쿄에서 발행된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南韓暴徒大討伐記念寫眞帖)』에 수록된 사진 가운데 한 장으로, 원본 실물이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20.5×14.7cm 크기의 이 사진은 거적 위에 두 줄로 앉아 있는 의병 16명(앞줄 6명, 뒷줄 10명)을 1909년 겨울에 촬영한 것으로 장소는 광주감옥이나 광주지방 재판소로 추정된다.
사진은 윗부분에 ‘폭도수괴(暴徒首魁)’ 라는 제목을 달고 한자로 의병들의 이름을 전열(前列)과 후열(後列)로 나누어 써놓았다.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는 사진 밑부분에 의병들의 이름을 한자로 적어놓았으나 ‘폭도수괴(暴徒首魁)’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 은 일본 사진가 야마모토 세이요(山本誠陽)가 비매품으로 제작, 발행한 것으로 일본군에 체포된 호남 의병장들의 사진을 비롯해 의병을 이끈 이른바 ‘폭도수괴(暴徒首魁)’ 심남일(沈南一)과 안계홍(安桂洪), ‘명량해전 이순신 송덕비’, ‘진주촉석루 아래 암벽’,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고전했던 전주성 관문인 완주 ‘만마관(萬馬關)’, ‘의병들이 사용했던 각종 무기(화승총, 쇠스랑, 창)’ 사진 등이 실려 있다.
이 사진첩은 현재 일본 사가현립대학(滋賀縣立大學) 박경식 문고(朴慶植文庫)에 한 권 보관돼 있고 우리나라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 복사본이 한 부 남아 있다.
경매를 통해 일본에서 어렵사리 원본 사진을 입수한 문승묵 씨는 “이 사진에 있는 의병장들은 대부분 처형을 당했다. 14명은 건국훈장을 받았고,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자수를 한 두 명(황두일, 송병운)은 훈장을 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의병 16명 가운데 대부분은 1909~1912년 사이에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했고, 황두일(黃杜一)과 그의 참모장이었던 송병운(宋丙雲)은 사형을 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승묵 씨는 “(두 의병이) 특별히 잘못한 이유가 없다면 건국훈장을 받는 쪽으로 청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발견된 원본 사진은 특히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 실려 있는 같은 사진과 의병의 이름이 다른 인물이 두 명이나 있어 앞으로 규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오른쪽 가슴에 포로 번호를 붙인 의병들의 이름은 뒤 열 오른쪽부터 나성화(羅聖化), 박사화(朴士化), 강사문(姜士文), 김유성(金有聲), 안주홍(安主洪, 본명 安圭洪), 전해산(全海山), 심남일(沈南一), 양진여(梁鎭汝), 김원국(金元局), 황두일(黃杜一), 앞 열 오른쪽부터 이영준(李永俊), 강무경(姜武京), 모천연(牟千年), 이강산(李江山), 이강산(李江山), 송병운(宋丙雲) 순으로 기재돼 있다.
원본 사진에는 김유성(金有聲, 본명은 金容球. 뒷줄 오른쪽에서 4번째), 전해산(全海山. 본명 全垂鏞. 뒷줄 6번째)으로 적혀 있으나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는 같은 인물의 이름이 김병철(金丙喆)과 조규문(曹圭文)으로 다르게 나와 있다. 의병 이름이 다른 것과 관련, 편집 과정의 착오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다른 인물인지는 면밀한 검토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호남지방의 의병들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전후, 항일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 따라 일본군은 전라도 의병 근거지를 소탕하기 위한 ‘남한 폭도대토벌 작전’을 벌여 그들을 체포, 처형을 일삼았고, 양민학살과 곡식 탈취 같은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이번에 찾아낸 호남 항일의병 원본 사진은 국권을 일제에 완전히 빼앗기기 직전, 뼈아픈 우리 역사의 생생한 증거로 높이 평가할 만한 귀중한 자료다.
사진=위,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 원본. 아래,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 수록된 호남의병장들 모습
사진제공=문승묵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