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어리 살어리랐다. 발아래 살어리랐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랐다.”
고교 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고려 시대의 가사 청산별곡(靑山別曲)을 짐짓 ‘ㄹ’ 발음에 혀를 굴리며 외웠던 생각이 난다. 청산별곡은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실려 있다.
『시용향악보』는 ‘시적 영감과 상상적 선율로 빚어낸 우리나라 고음악의 정화’(박천홍 현담문고 학예연구실장의 표현)로 1971년 8월 30일에 보물 제551호로 지정됐다. 한국학 보고인 현담문고가 지난해 말에 펴낸 『문자와 상상』 제7호는 『시용향악보』를 머리글 삼아 제6호(2021년 12월 발행)에 이어 ‘글과 그림의 행복한 만남’인 문학책 속의 그림(삽화)을 특집으로 꾸몄다.
박천홍 학예연구실장의 풀이로 비로소 그 참모습을 드러낸 『시용향악보』는 현담문고 소장 유일본으로 이번에 ‘쌍화곡’ 등 가사 16편을 새로 발견, 소개했다. 『시용향악보』는 ‘고대의 가요와 악보를 함께 수록한 악보집’이다. 1책 목판본이고 흰색 한지에 인쇄돼 있다. 이 책에 실린 악보 26편의 가사 가운데 16편은 그동안 제목조차 알지 못했던 것들로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시용향악보』는 원래 모두 83장이었지만 안타깝게도 5장은 유실되고 나머지 78장만 남아 있다. 이 악보집의 엮은이와 펴낸 곳과 시기를 알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추정해볼 수 있는 단서를 토대로 학자들은 조선 시대 성종~중종 사이에 장악원 악사들이 편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박천홍 실장은 “이 책의 원래 소장자는 애국 계몽가이자 역사학자, 언론인이었던 황의돈이었는데 어느 때인가 고서점 통문관으로 바뀌었다.”면서 “이 책은 그 희귀성과 학술적 가치 때문에 학계에서 주목을 받았고, 연세대 도서관장이었던 민영규 교수가 통문관 주인 이겸로와 의논, 영인본을 간행했다. 그런데 이 영인본을 제작하기 위해 원본을 해체하고 다시 모으는 과정에서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원본의 앞부분 5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원본 훼손 경위를 밝혔다.
박 실장은 “현재 현담문고 소장본 보물인 이 『시용향악보』는 유실된 5장의 빈자리가 그대로인 채 보존돼 있다”면서 “과거 문화유산 관리의 우울한 실태를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자와 상상』 제7호는 마해송의 동화책 『모래알 고금』의 겉표지를 표지로 삼았다. 1958년 경향잡지사가 펴낸 『모래알 고금』의 겉표지에는 이중섭, 속에는 만화가 안의섭의 그림이 실려 있다.
‘식민지 시대의 삽화와 장정’은 ‘억눌린 시대, 예술혼의 지향과 저항’으로, ‘해방 이후의 삽화와 장정’은 ‘풀려난 시대, 폭발하는 상상력과 미의 감각’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화가들이 장정한 책 그림과 간단한 해제를 곁들여 일목요연하게 편집해놓았다.
『문자와 상상』 은 6호에 이어 7호에서도 ‘글이 그리고 그림이 말하다’는 주제로 특집기사를 다루었는데, 화가와 문인, 그네들의 그림과 문자의 행복한 조합과 동거가 눈부신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현담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책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멋들어지게 꾸며진 『문자와 상상』은 우리 옛 책의 아름다움을 새삼 일깨워준다.
글. 홍윤표 OSEN 선임기자
사진. 현담문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