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전백승의 상승군(常勝軍)은 존재하기 힘들다. “이기고 짐은 병가에서 일상적 일이다[勝敗兵家之常事·승패병가지상사]”라는 병학의 금언이 지금까지도 회자하는 까닭이다.
이 맥락에서, 중국 고대의 사상가이며 도가의 비조(鼻祖)인 노자는 “패배를 경험한 군대가 이기게 마련이다[哀兵必勝·애병필승]”라고 역설했다. 비록 노자가 병법가는 아니었을망정 심리적 요소가 승패에 크게 작용하는 경쟁 세계의 섭리를 꿰뚫고 있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스포츠와 전쟁은 일맥이 통한다. “그라운드 또는 코트는 전장의 압축판이다.”라는 명제는 스포츠 세계의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손자병법을 비롯한 병가의 전략·전술이 스포츠에 통용되는 배경이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2022-2023시즌, 애스턴 빌라는 애병필승의 묘체를 뼈저리게 느꼈을 듯싶다. “빼앗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전국책』)”라고 하지만, 험난한 가시밭길을 가까스로 헤치고 나온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사령탑이 교체되는 우여곡절까지 겪었다. “감독, 곧 바람 앞의 등불이다”라는 표현처럼, 전임 스티븐 제라드 감독은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절대 왕정 시절에도 군주는 “물을 건널 때는 말을 갈아타지 않는다.”라며 웬만하면 전쟁 중에 장수를 교체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시즌 중 감독 교체의 극약 처방은 묘약이 된 듯싶다. 우나이 에메리 감독이 새로 사령탑에 앉은 뒤 일신된 모습을 보이며 기세를 떨친다. 한때 꼴찌나 다름없는 19위로 처져 강등을 걱정해야 했던 약체의 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한 자릿수 순위를 눈앞에 둔 다크호스로 떠오른 애스턴 빌라다.
에메리 감독, 지휘봉 잡고 승점 16 쓸어 담아… 선두 아스널에만 뒤져
2022-2023시즌 개막 전, 애스턴 빌라 팬들은 지난 시즌 14위에서 10위권 내 진입 꿈을 부풀렸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7명의 새로운 얼굴을 영입해 이룬 전력 보강에서 비롯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초반 13경기를 치르는 동안 단 3승에 그쳤다. 반면 일곱 번씩이나 패배의 굴레를 썼다. 5라운드가 끝났을 때, 순위는 19위(1승 4패·승점 3)였다.
구단은 충격요법을 전격 단행했다. 월드 스타 출신인 제라드 감독을 퇴진시키고 스페인 라리가에서 명장의 면모를 뽐낸 에메리 감독을 영입했다. 세비야(2013~2016년)와 비야 레알(2020~2022년)를 이끌고 UEFA(유럽축구연맹) 유로파리그(UEL) 정상을 네 번씩이나 밟으며 ‘UEL 제왕’으로 군림한 에메리 감독의 지도력을 믿은 처방전이었다.
묘방이었다. EPL이 반환점을 돈 지금, 에메리 감독은 애스턴 빌라 팬들의 마음속에 ‘구세주’로 아로새겨졌을 성싶다. 패배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그 시절의 나약했던 면모를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탈바꿈한 애스턴 빌라다.
지난해 11월 초, 에메리 감독이 팀을 물려받았을 때, 애스턴 빌라는 강등권 팀에 고작 1점 앞선 상태(16위)였다. 그랬던 팀이 지금 11~20위 가운데 가장 윗자리에 앉아 있다. 돈 많은 명문 구단으로 10위인 첼시(29점)와 승점 차는 불과 1점이다.
에메리 감독은 애스턴 빌라 사령탑에 앉은 뒤 7경기를 지휘했다. 그리고 믿기 힘들 만치 많은 승점(16)을 쓸어 담았다. 5승(1무)을 쌓는 동안 단 한 번만 졌다. 첫 회전에서 만난 명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11월 6일·현지 일자)가 애스턴 빌라가 만들어 갈 돌풍의 단초가 된 제물(1-3)이었다.
'승부사’ 에메리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이래, 애스턴 빌라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수치가 있다. 이 기간에, 획득한 승점이다. 에메리 감독 체제 아래에서, 애스턴 빌라는 승점 16을 얻어 놀랍게도 2위에 올랐다(표 참조).
약 2개월 20일의 같은 기간에, 애스턴 빌라보다 많은 승점을 얻은 팀은 1위를 달리는 아스널뿐이다. 미켈 아르테타 감독이 이끄는 아스널은 선두 팀답게 패배 없이 6승 1무로 승점 19를 획득했다.
다승점 10걸 가운데, 10위권 밖의 팀은 애스턴 빌라와 노팅엄 포리스트(13위)뿐이다. 노팅엄 포리스트는 3승 3무 1패를 거둬 승점 12를 올리며 풀럼과 함께 9위에 자리했다. 애스턴 빌라와는 상당한 거리가 느껴지는 순위다.
지금 애스턴 빌라의 안마당인 빌라 파크엔 긍정적 기운이 감돈다. 애스턴 빌라는 1874년 닻을 올렸을 만치 전통 깊은 구단이다. 1888년 풋볼리그와 1992년 EPL의 창립 멤버라는 사실에서도, 애스턴 빌라의 역사와 연륜이 배어 나온다.
“장수 나자 용마 났다.”라고 한다. 위기에 영웅이 나오듯, 명장도 좋은 때를 만나야 잠재력을 한껏 분출할 수 있다. 에메리 감독과 애병필승의 애스턴 빌라는 궁합이 맞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장수는 전장에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승패를 다투며 희열과 비분의 엇갈림 속에서, 삶의 순간순간을 맞이하고 헤쳐 나간다. 그들에게 이기고 짐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에메리 감독이 애스턴 빌라를 이끌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지 궁금해지는 EPL 이번 시즌 후반부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