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은 권순찬 감독을 내치면서 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했던 것일까. 다른 이유도 아닌 프런트의 월권 행위로 사령탑이 억울하게 짐을 쌌는데 그 후폭풍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흥국생명은 지난 10일 “감독으로 선임 발표된 김기중 감독이 심사숙고 끝에 감독 선임을 고사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라며 “구단은 김기중 감독의 뜻을 존중하며 당분간 김대경 감독대행 체제로 시즌을 치를 예정이다. 감독 선임에 있어 물의를 일으킨 점 정중히 사과드린다”라고 공식 발표했다.
흥국생명은 지난 2일 팀을 잘 이끌던 권순찬 감독을 돌연 해임했다. 수뇌부의 경기 개입이라는 초유의 사태 속 억울하게 짐을 싼 권 감독이었다. 이후 권 감독을 보좌하던 이영수 수석코치마저 감독대행으로 5일 GS칼텍스전을 치른 후 팀을 떠나며 감독과 수석코치 자리가 한순간에 공석이 됐다.
흥국생명은 빠르게 신용준 단장을 선임한 뒤 과거 박미희 감독 아래서 4시즌 동안 수석코치를 맡았던 김기중 선명여고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흥국생명은 김 감독을 “풍부한 현장 경험과 지도력을 겸비한 적임자”라고 치켜세웠고, 김 감독은 “지난 4년간 동고동락했던 흥국생명에 돌아와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됐다. 팬들의 열정적인 응원에 보답할 수 있도록 좋은 경기를 보여드리겠다”라고 부임 각오를 전했다.
하지만 김 감독의 지도자 데뷔는 없던 일이 됐다. 감독 선임을 언론에 발표하고도 “선임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했다”라는 구단의 황당한 해명 속에 감독대행의 대행인 김대경 코치가 8일 IBK기업은행전을 지휘했다. 그리고 김 감독은 부임 나흘 만에 “지금 감독직을 수행하는 것이 그 동안 노력해준 선수단과 배구 관계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라며 감독직을 고사했다.
지난 2일부터 10일까지 약 열흘 사이 감독 2명이 물러났고, 감독대행과 감독대행의 대행으로 경기를 치르는 대혼란이 발생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선수들이 똘똘 뭉쳐 4연승을 해냈지만 베테랑 김해란, 김연경부터 신예 김다은까지 선수단 전체가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그 건강하던 김연경이 장염 여파로 시즌 첫 결장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여기에 김대경 대행마저 “구단에 피해자가 많다. 다들 마음속으로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라고 고충을 털어놓으며 흥국생명의 무능 행정에 비난의 화살이 쏠렸다.
김대경 코치는 권순찬 감독, 이영수 수석코치에 이은 제3의 지도자였다. 이제 한창 코치로서 현장 경험을 쌓을 시기다. 물론 이른 나이에 은퇴해 2013-2014시즌부터 지도자를 맡았다고는 하나 그의 나이는 김연경보다 1살 많은 불과 36세다. 그러나 아비규환 행정으로 인해 흥국생명은 당분간 1987년생 김대경 대행과 1992년생 최지완 코치로 팀을 이끌게 됐다. 2위 감독을 내친 결과 선수뿐만 아니라 코칭스태프마저 강제 리빌딩이 됐다.
향후 흥국생명 감독직을 맡으려는 지도자가 나타날지는 의문이다. 구단이 공식 사과문을 통해 경기운영 개입 인정과 함께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신뢰도가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새롭게 부임한 신용준 단장마저 부임 첫날 ‘유튜브 발언’으로 또 하나의 논란을 일으켰다. 아울러 배구계는 이번 사태로 흥국생명 코칭스태프 자리를 기피직으로 여기게 됐다. 김기중 감독 또한 배구인들의 거센 만류에 감독직 고사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순찬 감독을 몰아낼 때만 해도 이 정도로 사태가 커질 줄 몰랐던 것 같다. 권 감독에 이어 이영수 수석코치가 팀을 떠났고, 위기를 수습할 적임자라고 치켜세웠던 김기중 감독은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현 상황이 부담이다”라며 신임 감독직을 고사했다. 2위팀 감독을 구단의 방향성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해임한 ‘월권 구단’ 흥국생명이 맞이한 씁쓸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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