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저축은행처럼 개막 17연패를 한 것도 아니고, 한국도로공사처럼 페퍼저축은행의 첫 승 희생양이 된 것도 아니다. 흥국생명은 왜 선두 현대건설과 2강 체제를 구축한 권순찬 감독을 부임 9개월 만에 내친 것일까.
2022-2023 V리그 여자부 4라운드를 앞둔 흥국생명 구단은 2일 오후 보도자료를 통해 “김여일 단장과 권순찬 감독을 동시에 사퇴키로 결정했다”라고 발표했다.
흥국생명 임형준 구단주는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권순찬 감독과 헤어지기로 결정했으며, 단장도 동반 사퇴키로 결정했습니다”라며 “핑크스파이더스를 사랑해주시는 팬 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팀을 이끌어온 권순찬 감독께는 감사드립니다”라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흥국생명은 지난 4월 1일 8시즌 동안 팀을 이끌었던 박미희 감독과 결별하고 권순찬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당시 구단은 “팀을 새롭게 재건할 지도자를 찾았다. 솔선수범형 리더이자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권순찬 감독이 핑크스파이더스의 명예를 다질 적임자다”라며 “균형 감각이 뛰어난 권순찬 감독이 남자프로팀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핑크스파이더스를 빠르고 조직력 강한 최고의 팀으로 바꿀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라고 기대를 한껏 드러냈다.
권 감독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앞세워 지난 시즌 6위(10승 23패)에 그친 팀을 빠르게 쇄신했다. 컵대회와 시즌 초반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절대 1강’ 현대건설과 2강 체제를 구축하며 2018-2019시즌 이후 4시즌만의 우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돌아온 김연경을 비롯해 김해란, 옐레나, 김미연, 김나희, 이주아, 김다솔 등이 탄탄한 팀워크를 뽐내며 최근 선두 현대건설의 홈 24연승을 저지, 팀 분위기 또한 굉장히 좋은 상태였다. 흥행 면에서도 흥국생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압도적 인기를 얻고 있던 터.
흥국생명 관계자에 따르면 이날 오전 갑작스럽게 감독, 단장 동반 사퇴가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의 경질이다. 그러나 여전히 납득할만한 사퇴 배경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물론 구단주는 구단의 방향성과 부합하지 않는 단장과 감독을 물러나게 할 권한을 갖고 있지만 흥국생명의 현재 순위는 한때 개막 16연승을 질주했던 선두 현대건설에 불과 승점 3점 뒤진 2위다. 3위 GS칼텍스와의 격차는 승점 17점. 감독, 단장 사퇴가 의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구단 관계자 또한 전화통화에서 해당 사태에 최대한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가장 피해를 보는 건 2위로 반환점을 돈 선수들이다. 흥국생명은 당장 감독 없이 이영수 감독대행 체제로 5일 GS칼텍스와의 홈경기를 치러야한다. 팀 성적이 좋은 상황에서 감독이 사퇴하는 악재가 발생하며 선수단 분위기 또한 동요가 불가피하다. 김연경, 옐레나, 김해란 등 주축 선수들은 시즌 도중 권 감독의 리더십에 만족을 드러낸 바 있다.
흥국생명은 빠르게 새로운 단장을 내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만간 신임 단장 체제에서 권 감독의 뒤를 이을 사령탑 물색 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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