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의 고성능 순수 전기차 ‘EV6 GT’의 특성을 보편적으로 묘사하는 문구는 ‘한국 역사상 가장 빠른 자동차’다. 맞는 말이다.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 속력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 3.5초, 차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력 260km/h의 객관적 데이터가 ‘한국 역사상 가장 빠른 차’를 증명해 준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EV6 GT를 평가할 수도 있다. 필자는 모델의 다양성 측면에서 이 차를 보려 한다.
생물학에서 ‘종내 다양성’을 확보한 종은 환경이나 질병에 맞설 때 그렇지 못한 종보다 집단 내성이 훨씬 강하다. 특정 종이나 집단에서 개체간 서로 다른 DNA 염기배열이 존재한다면 유전적 다양성이 높아지고, 높아진 유전적 다양성은 상위개념인 종내 다양성으로 확장된다.
기아의 순수 전기차 ‘EV6’나 ‘EV6 GT’는 같은 이름을 쓰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같은 종이다. 그런데 두 차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같은 종 안에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한 셈이다.
다양성의 확보는 글로벌 메이저 자동차 브랜드에서는 이미 보편적 현상이다.
독일의 프리미엄 3사는 모두 같은 차급에서도 일반 모델과 고성능 모델로 다양화된 라인업을 짜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AMG, BMW의 M, 아우디의 RS가 대표적인 고성능 라인업이다. 아우디의 경우는 일반 모델에는 A, 고성능 모델에는 S(Soverign Performance), 레이싱 모델에는 R/RS(Renn Sport)를 붙여 종내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다. Renn은 Racing을 뜻하는 독일어다.
현대자동차그룹에서도 이 같은 종내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별도의 고성능 브랜드 N을 두고 있다.
기아가 EV6 GT를 운영하는 것은 N 브랜드를 사용할 수 없는 고육지책에서 나온 방편이기는 하다. N 대신 GT를 쓴다고 해서 다양성 추구의 본질의 훼손되는 건 아니다.
기아가 EV6 GT 출시에 즈음해 낸 자료에는 “기아는 EV6 GT를 시작으로 향후 출시 예정인 전기차에 고성능 버전인 GT 모델을 브랜드화해 지속 운영할 계획이다”는 문구가 분명히 들어 있다.
이렇게 되면 소비자들은 EV6 한 차종에서 성격이 크게 다른 3개의 모델을 선택할 수 있다. 일반 모델인 EV6, 고성능 모델의 일부 특성을 흉내 낸 GT라인, 그리고 고성능 GT까지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세 모델의 외형은 비슷하다. EV6 롱레인지 모델이 전장 4,680mm, 전폭 1,880mm, 전고 1,550mm, 축거 2,900mm를 갖고 있는데, EV6 GT 라인은 전장 4,695mm, 전폭 1,890mm, 전고 1,550mm, 축거 2,900mm이다. EV6 GT는 GT라인과 나머지는 똑같고 전고만 1,545mm다.
그런데 출력과 토크로 가면 완전히 달라진다. 롱레인지와 GT라인의 2WD 모델은 모터 최고 출력이 168kW, 최대 토크가 250Nm다. 4WD 모델은 좀더 강해 모터 최고 출력이 239kW, 최대 토크가 605Nm다. 이랬던 것이 EV6 GT로 가면 비교 불가 수준으로 뛴다. 모터 최고 출력이 430kW, 최대 토크가 740Nm다.
사륜구동 단일 트림으로 운영되는 EV6 GT는 최고출력 270kW, 최대토크 390Nm의 후륜 모터와 최고출력 160kW, 최대토크 350Nm의 전륜 모터를 더해 합산 430kW(585마력)의 최고출력과 740Nm(75.5kgf·m)의 최대토크를 갖췄다. EV6 GT에 적용된 고성능 모터의 분당 회전수(rpm)는 최고 21,000회에 달해 저속에서부터 최고 260km/h까지 모든 속도 영역에 대응할 수 있다.
배터리는 세 모델 모두 77.4kWh짜리를 쓴다. 하지만 모터가 달라 1회 충전시 복합 주행거리도 크게 달라진다. 롱레인지 2WD가 475km, 4WD가 441km를 보이고 GT라인은 2WD가 434km, 4WD가 351km를 찍는다. 그러나 GT로 가면 342km로 확 줄어든다.
이제, GT는 어떤 이들을 타깃으로 개발됐는 지 보자.
이 차의 미디어 시승행사는 충남 태안의 ‘HMG 드라이빙 익스피리언스 센터(HMG Driving Experience Center)’에서 열렸다.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곳에는 8개의 주행 체험 코스가 있다. 브레이크 성능을 알아보는 제동 코스, 가혹한 조건에서의 주행 성능을 테스트하는 마른 노면 서킷, 비가 오는 상황을 가정한 젖은 노면 서킷, 시속 300km 가까이 초고속 주행성능을 알아보는 고속주회로, 장애물 회피 능력을 테스트하는 짐카나(gymkhana) 및 복합 슬라럼(slalom) 코스, 드리프트(drift)를 체험하는 젖은 원선회 코스, 오버 스티어링 대응력을 테스트하는 킥 플레이트(kick plate) 코스, SUV 차량의 오프로드 성능을 알아보는 경사로·자갈·모래·범피·수로 코스가 있다.
미디어 시승 행사 당시 기아는 8개의 코스 중 6개의 코스를 프로그램 안에 넣었다. 킥 플레이트 코스와 오프로드 코스만 프로그램에서 빠졌다. EV6 GT는 오프로드에 올릴 차는 아니기 때문이다.
백미는 역시 드리프트와 고속 주회로였다.
특히 EV6 GT에 ‘드리프트(drift) 모드’가 있다는 건 획기적이었다. 드리프트는 숙련된 운전자들도 구현하기 어려운 고난도 기술이다. EV6 GT는 의도적으로 구동력을 달리 해 드리프트를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선회 시 후륜 모터에 최대 구동력을 배분해 차량이 실제 조향 목표보다 안쪽으로 주행하는 현상인 ‘오버스티어(over steer)’를 유도한다. 선회 탈출 시에는 전륜에 구동력을 배분해 후륜에만 구동력을 배분했을 때보다 더욱 빠르게 곡선 구간을 벗어날 수 있게 했다. 덕분에 숙련되지 않은 운전자도 드리프트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고속 주회로 체험에서 기자들은 시속 230km 남짓 낼 수 있는 구간에서만 차를 몰았다. 사이클의 벨로드롬처럼 생긴 고속 주회로에서 지면에 가까운 차로만 달려서 얻어낸 속력이다. 시속 260km까지 낼 수 있는 벨로드롬 최상단의 주행로는 전문 드라이버가 운전하고, 기자는 동승자석에서 체험만 했다. 속도계가 시속 250을 넘어가자 비행기가 하늘을 날 듯 세상은 되레 고요해졌다. 스펙상의 최고속도는 에누리 없이 증명이 됐다.
이 같은 속력이 가능한 배경은 차체 내 고성능 메커니즘에서 찾을 수 있다.
기아는 운전자가 고속에서도 차량을 쉽게 제어할 수 있도록 ‘전륜 스트럿링’ 및 ‘후륜 러기지 플로어 보강바’로 차체를 강화했다. 랙 구동형 파워 스티어링(R-MDPS)과 가변 기어비(VGR) 기술을 통해 속도에 따른 조향 응답성을 최적화했으며, 미쉐린社의 GT 전용 퍼포먼스 타이어를 끼워 조정 및 주행 안정성을 추가로 확보했다.
전자식 차동 제한장치(e-LSD)는 좌우 바퀴 구동력을 능동적으로 제어해 안정적이고 빠르게 곡선 구간을 주행할 수 있게 돕고, 전자 제어 서스펜션(ECS)은 주행모드에 따라 댐퍼 감쇠력을 조절함으로써 차량 자세를 최적 제어한다. 기본 모델보다 크기와 성능을 향상시킨 전륜 모노블럭 4피스톤 캘리퍼는 뛰어난 제동성능을 제공하고, 시각적으로도 위압감을 준다.
EV6 GT의 가격은 개별소비세 3.5% 및 세제혜택 후 기준 7,200만 원이지만 고성능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선택지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기쁨이다.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