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축구가 굴기(崛起)하고 있다. 2022 카타르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은 이를 여실히 보여 주는 무대다. 대회 초반 최대 화두는 아시아 축구가 일으킨 돌풍이다.
1930년에 첫 잔을 띄운 월드컵이 92년의 연륜을 쌓는 동안 한 대회 초반부에 이처럼 거센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적은 여태껏 없었다. 그룹 스테이지 1라운드를 끝내고 2라운드 ¼을 마친 25일(이하 현지 일자) 아시아 국가는 벌써 3승을 거둬들였다. 세계가 예상하지 못했던 아시아 축구의 초반 돌개바람이다.
그 거센 바람에, 우승 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와 독일이 휩쓸렸다. ‘축구 본향’인 영국에 뿌리를 둔 4개국 가운데 하나인 웨일스 역시 쓴맛을 봤다. 월드컵 발원지로서 초대 챔프에 올랐던 전통 강호 우루과이는 자칫 굴러떨어질 뻔했다. FIFA 랭킹(10월)에서 20위권 안에 들어가는 아르헨티나(3위), 독일(11위), 우루과이(14위), 웨일스(19위)가 치른 곤욕이었다.
한국·일본·사우디아라비아가 핵을 이룬 아시아 축구, 역대 그룹 스테이지 최대 승수 확실시
20년 전, 아시아는 전 세계 축구 판도에 격변을 일으키며 월드컵 역사에 굵은 한 획을 그었다.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했던 대회에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맹위를 떨쳤다. 한국이 4위의 위업을 이뤘고, 일본도 그룹 스테이지 관문을 뚫고 16강에 올랐다. ‘축구 변방’에 불과하던 아시아가 일약 중심권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을 앞세운 아시아 축구의 약진은 평가절하의 시선을 따돌릴 수 없었다. “개최국 프리미엄에 따른 한때의 용트림일 뿐이다”라는 시각이 주된 흐름이었다.
그 뒤 2018 러시아 월드컵까지 네 차례 대회에서 나타난 AFC(아시아축구연맹) 회원국의 성적은 이 시각에 힘을 실어 줬을 뿐이었다. 한국(2010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일본(2018 러시아)이 각각 한 차례씩 16강 진출 티켓을 따내는 데 그쳤으니, 뭐라 변명할 거리도 궁색했다.
그렇지만 이번 카타르 대회만큼은 심상찮은 조짐이 엿보인다. 아시아 축구가 “더는 세계 축구의 들러리로서 희생양이 될 수 없다”라고 외치는 듯한 기류가 초반에 강하게 일고 있는 모양새다.
20세기까지 역대 월드컵에서, 아시아 축구는 그야말로 초라한 몰골이었다. 월드컵 데뷔조차도 다섯 번째 대회에서야 비로소 이뤄졌다. 1954 스위스 대회에 한국이 모습을 나타내며 아시아 축구의 존재를 알렸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그룹 스테이지에서, 헝가리에 0-9로, 터키에 0-7로 각각 크게 졌다. 제4회 대회인 1950 브라질 대회 출전권을 획득하고도 본선 무대에 나가지 않은 인도가 어쩌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 모를 수모였다.
AFC 회원국으로 첫 승의 영광은 북한이 안았다. 1966 잉글랜드 대회에서, 북한은 ‘사다리 축구’의 진기(?)를 선보이며 조별 라운드 마지막 이탈리아전을 1-0 승리로 장식했다. 그 과실은 8강 진출이었다(표 참조).
월드컵 마당에서, 이후 단절됐던 아시아 축구 승리의 맥은 28년 만에 재현됐다. 1994 미국 대회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2승을 올리며 16강 티켓을 따냈다.
2002 한·일 대회는 아시아 축구가 사상 최대 수확을 올렸던 무대였다. 그룹 스테이지에서, 한국과 일본은 나란히 2승씩 총 4승을 결실하며 조 1위로 결선 스테이지에 나갔다.
8년 뒤 2010 남아공 대회에서도, AFC 회원국은 그룹 스테이지에서 똑같은 4승을 거뒀다. 일본이 2승으로 앞장섰고, 한국과 호주가 각긱 1승씩으로 뒤를 받쳤다.
2014 브라질 대회에서 1승도 건지지 못하는 굴레를 뒤집어써야 했던 아시아 축구는 2018 러시아 대회에서 3승을 기록하며 반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번 대회는 역대 최대의 결실이 전망된다. 초반 6일 동안에 벌써 역대 3위에 해당하는 3승을 올린 데서 나온 자연스러운 기대치다. 사우디아라비아(그룹 C)와 일본(E)이 독일을 제각각 2-1로 따돌렸고, 이란(B)은 웨일스를 2-0으로 물리쳤다.
10회 연속 본선 진출과 4강 쾌거 등 월드컵 무대에서 아시아 축구를 대변해 온 한국(H)도 선풍을 거들었다. 우루과이와 팽팽한 접전 끝에 0-0으로 비겼다. 비록 승부를 가리지 못하긴 했어도, 파울루 벤투 감독이 추구해 온 ‘빌드업 축구’를 완벽에 가깝게 연기하는 몸놀림으로 강렬한 인상을 아로새기며 16강 진출 가능성을 한결 드높였다.
이번 대회에, AFC는 6개국이 모습을 보였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호주·사우디아라비아·이란 등 5개국이 지역 예선 관문을 돌파했고, 카타르가 개최국 자격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들 6개국이 그룹 스테이지에서 소화할 경기 수는 한 나라당 3경기씩 모두 18경기다.
이 중 아직 절반에 채 이르지 않은 8경기를 치른 상태에서, 일찌감치 3승을 올렸다. 초반 1~2경기에서 나타난 경기력을 봤을 때, 앞으로 남은 10경기에서 충분히 기록 돌파가 가능하리라 내다볼 수 있다.
그룹 스테이지는 12월 2일까지 총 48경기가 펼쳐진다. 이날까지 아시아 축구가 과연 몇 승을 올려 역대 그룹 스테이지 최고 기록을 세우며 ‘풍년가’를 부를지, 귀추가 주목된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