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는 “의욕이나 자신감 따위로 충만하여 굽힐 줄 모르는 기세”(표준국어대사전)를 말한다. 당연히, 사기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장들은 아군의 사기를 높이고 적군의 사기를 꺾는 데 전략의 초점을 맞췄다. 한때 유럽 대륙을 석권했던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군대의 실력은 그 ¾이 사기로 이뤄진다.”라고 했을 정도다.
한(漢)과 초(楚)가 천하를 다투던 때에 마지막 해하 전투에서, 한의 한신이 운용한 사면초가(四面楚歌) 전술은 대회전의 승패를 가른 절묘한 책략이었다. 사방을 포위한 한의 군사들이 부른 초나라 노래에, 초의 군사들은 전투할 의욕을 잃고 급기야 탈영에 급급했다. 물론, 승부의 저울추는 한나라로 기울어졌다. 그 결과는 초패왕 항우의 자진과 한왕 유방의 천하 평정으로 나타났다.
“용병에 능한 장수는 적의 예리한 기세를 피하고 사기가 해이해지고 사라졌을 때 공격한다.”(『손자병법』 「군쟁편」) 고대 최고 병법가로 손꼽히는 손자도 이처럼 사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기선을 제압함은 무척 중요하게 여겨졌다. “먼저 소리를 질러 상대를 제압한다[先聲奪人·선성탈인]”라는 방략은 그중 하나다. 먼저 아군의 위세를 과시하고 그 기세를 바탕으로 적군의 사기를 억누르고 한 걸음 앞서 나감으로써 주도권을 장악한다는 이 모략은 장수들이 가슴속에 새겨 둔 한 수였다.
스포츠는 곧잘 ‘전쟁의 축소판’으로 비유되곤 한다. 운동경기는 한판 한판이 ‘총성 없는 전장’이다. 으레 기선을 누가, 또는 어느 팀이 틀어잡느냐가 승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은 전쟁이나 스포츠나 똑같이 통용된다.
축구는 다른 구기 종목에 비해 득점 수가 가장 적다. 그만큼 한두 골 차로 승패가 갈리는 경기가 많다. 따라서 기선을 제압하는 첫 골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다. 선제골을 터뜨린 팀은 여유를 갖고 초조한 상대 팀을 공략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할까?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축구의 대제전인 월드컵에서, 선제골이 승부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살펴보면 긍정적 현상으로 귀결됐음이 눈에 띈다.
최다 선제골 주인공 호나우두, 패배를 몰라… 비야·비에리 공동 최다 선제골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은 1930년 우루과이에서 발원했다. 92년이 흐르며 지금까지 스물한 번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열리지 못한 두 번(1942년, 1946년)을 빼곤 4년마다 세계 최고 축구 강국의 영예를 차지하려는 불꽃 튀는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같이 100년 가까운 나이바퀴가 쌓인 월드컵 마당에서, 선제골을 가장 많이 폭발시킨 골잡이는 세 명이었다. 크리스티안 비에리(이탈리아), 호나우두(브라질), 다비드 비야(스페인)가 다름없이 6경기에서 선제골을 터뜨렸다(표 참조).
비에리는 1998 프랑스 대회와 2002 한·일 대회에서 각각 3경기씩 선취골을 수확했다. 호나우두는 1998 대회에서 2회, 2002 대회에서 3회, 2006 독일 대회에서 1회 등 모두 여섯 번 선제골을 결실했다. 비야는 2006 대회에서 1회,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에서 4회, 2014 브라질 대회에서 1회 등 총 여섯 번 그 경기의 첫 골을 넣었다.
세 명이 기록한 18회 선제골 경기의 승패는 13승 2무 3패였다. 승률(무승부는 0.5로 계산)은 77.8%로 무척 높은 편이었다. 선취골을 넣으면 열 번 중 여덟 번은 이긴다는 결과로 나타났다. 곧, “선제골은 승패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다”라는 명제가 타당함을 알 수 있는 귀결이다.
자신이 선제골을 터뜨린 경기에서, 호나우두는 패배를 몰랐다. 5승 1무로, 승률이 91.7%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는 챔피언골도 있었다. 2002 대회 결승전에서, 호나우두는 팽팽한 승부가 이어지던 후반 22분 선제골을 잡아내 2-0 완승의 기틀을 마련했다. 12분 뒤 추가골도 호나우두의 몫이었다. 호나우두는 이 대회 4강 터키전(1-0승)에서도 후반 4분 선제 결승골을 뽑아냈다. 브라질이 5회 우승하며 최다 등정의 영광을 안는 데 밑바탕이 된 호나우두의 잇단 선제골이었다.
호나우두의 선제골이 유일하게 무승부로 나타난 경기는 1998 대회 준결승 네덜란드전이었다. 호나우두가 후반 1분 선취골을 넣었으나, 네덜란드는 후반 42분 파트릭 클라위버르트의 동점골로 응수했다. 연장 격전(1-1무) 끝에 들어간 승부차기에서, 브라질이 4-2로 이겼다.
비야도 선제골 패배와 낯설었다. 5승 1패로, 승률은 83.3%였다. 비야는 2010 대회 때 스페인이 정상에 오르는 데 버팀목이었다. 그룹 라운드(H) 2경기[온두라스(2-0승)·칠레(2-1승)], 16강 포르투갈전(1-0승), 8강 파라과이전(1-0)에서 선제골을 터뜨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16강~8강전은 선제골이 유일한 득점이자 결승골이었다.
비야가 선취골을 잡고도 당한 유일한 패배는 2006 대회 16강 프랑스전이었다. 비야가 전반 28분 첫 골을 넣은 스페인이 기선을 잡는 듯했으나, 프랑스의 맹공에 1-3으로 무너졌다.
비에리는 선제골 횟수는 같아도 순도 면에서 뒤떨어졌다. 3승 1무 2패로, 승률은 58.3%였다. 비에리는 1988 대회에서 패배와 거리를 뒀으나(2승 1무), 2002 대회 때 신의 희롱(?)을 비껴가지 못했다. 그룹 라운드(G) 크로아티아전에서, 선취골을 넣고도 역전패(1-2)에 마주해야 했던 비에리에게 가장 비운의 한판은 16강 한국전(1-2패)이었다. 비에리는 전반 18분 만에 선취골을 뽑고 환호했다. 그러나 경기 종료 2분 전 설기현에게 동점골을 빼앗기고 연장 후반 12분 안정환에게 골든골을 얻어맞은 극적 전개에, 비에리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2022 카타르 FIFA 월드컵은 한국시간 21일 새벽 대망의 막을 올린다. 이번 대회에선, 또 어떤 선제골 역사가 그려지며 희비쌍곡선을 빚을지 벌써 기다려진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