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기관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이 보닛을 열 때는 두 가지다. 엔진룸에 들어가 있는 복잡한 부품이 고장이 났을 때와 엔진오일이나 워셔액 같은 소모품을 갈거나 보충할 때이다. 흔치 않지만 엔진룸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 지 궁금하거나, 괜히 자동차에 대해 잘 아는 척을 하고 싶을 때도 보닛은 열린다.
그런데 그 차가 전기차라면, 굳이 보닛을 열어 볼 필요가 있을까? 엔진오일은 평생 갈 일이 없고, 보닛 안쪽에도 모터와 전기장치 말고는 별 게 없다. 딱 하나 워셔액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보닛을 열어야 한다.
만약 워셔액을 주입하는 입구를 따로 낸다면? 보닛은 고압의 전류가 흐르는 전기장치로부터 운전자를 보호하는 덮개로 주임무가 바뀐다.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가 최근 출시한 ‘더 뉴 EQE’는 운전자가 보닛을 열 수 없게 돼 있다. 워셔액 주입구는 운전석 사이드 미러 아래쪽에 앙증맞게 뚫려 있다. 보닛은 정비공장에서 특수 장치로만 열수 있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쓰는데, 본체 덮개를 열어볼 일은 거의 없다. 전기차에 진심인 메르세데스-벤츠는 불문율처럼 알고 있는 ‘자동차 상식’을 바꾸려 하고 있었다.
최근 미디어 시승행사에서 만난 ‘더 뉴 EQE 350+’는 여러 면에서 ‘상식을 깨라’고 주문한다.
‘더 뉴 EQE’는 메르세데스-벤츠의 대형 전기차 전용 아키텍처 ‘EVA2’를 기반으로 개발된 두 번째 모델이다. 대형 세단 EQS가 첫 번째이자 플래그십 세단 구실을 했고, EQE는 ‘S’를 잇는 럭셔리 비즈니스 세단으로 개발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국내에 출시된 ‘더 뉴 EQE 350+’는 전장이 4,965mm, 휠베이스가 3,120mm이며 88.89kWh 용량의 배터리를 얹어 완충시 최대 주행거리는 471km로 인증을 받았다. 모터 최고출력은 215kw(약 292마력), 최대토크는 565Nm(약 57.6kgf.m)이다. 정지상태에서 100km/h까지 이르는데 걸리는 시간은 6.4초이고 권장소비자가격은 1억 160만 원(개별소비세 인하분과 세제혜택 반영치)이다.
그 동안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가 그래왔던 것처럼 고성능 AMG 모델, 사륜구동 4MATIC 모델이 순차적으로 출시될 계획이다.
▲브레이크를 멀리하라
내연기관 자동차에서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는 운전의 양날개 같은 구실을 한다. 자동변속기가 나오기 전에는 클러치도 한 몫을 했지만 지금은 잊혀 진 존재다. 그런데 ‘더 뉴 EQE’에서는 브레이크를 되도록 멀리하라고 가르친다.
장차 완전 자율주행 시대가 오면 브레이크는 물론이고 가속페달도 필요 없어진다. ‘더 뉴 EQE’는 우선 브레이크를 멀리하는 습관을 가르치고 있었다.
전기차에서 브레이크를 대신하는 기능은 회생제동이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 소멸되는 운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회수해 도로 배터리에 채우는 게 회생제동이다. 회생제동을 잘 활용하면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도 차를 세울 수 있다. 물론 급정거를 해야 할 때는 예외적이다.
‘더 뉴 EQE’는 회생제동에 4가지 선택권을 줬다. ‘일반 회생제동’ ‘강력 회생제동’ ‘회생제동 안함’ ‘인텔리전트 회생제동’을 운전자가 패들시프트로 선택할 수 있게 했다. ‘강력 회생제동’은 흔히 말하는 원페달 드라이빙이다. 이 옵션에서 운전자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액셀을 밟는 행위만으로 주행과 정차를 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서로 용어만 다를 뿐, 이미 익숙한 기능들이다. 그런데 ‘인텔리전트 회생제동’은 새로웠다.
인텔리전트 회생제동은 ‘회생제동 안함’과 ‘어댑티드 크루즈 컨트롤’을 섞어 놓은 듯한 구실을 했다. 이 옵션은 고속주행 상황과 교통 체증 상황을 구분해 반응한다.
전방에 막힘이 없이 운전자가 원하는 속도로 주행을 할 수 있을 때에는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고 있어도 차가 관성주행을 한다. 가속페달을 밟았을 때의 주행속도를 거의 손실없이 유지한다. ‘원페달 드라이빙’은 발을 떼는 순간 회생제동이 작동하기 때문에, 구사할 수 없는 재주다.
인텔리전트 회생제동은 전방에 다른 차량이 감지되면 완전히 다른 성격을 보인다. 마치 ‘어댑티드 크루즈 컨트롤’이 활성화된 것처럼 스르르 속도를 줄이고, 정차까지 한다. 앞차가 움직이면 출발도 알아서 한다.
브레이크를 쓸 일이 없다는 점에서는 원페달 드라이빙과 유사하지만 고속 주행에서 관성 주행을 할 수 있다는 건 원페달 드라이빙과 크게 다르다. 인텔리전트 회생제동은 브레이크와는 당당히 이별을 고하고, 가솔페달과도 이별 준비를 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다만, 브레이크는 회생제동에 무게가 많이 쏠린 나머지 내연기관차의 그것과는 이질감이 꽤 크다. 내연기관 운전습관대로 브레이크를 밟았다가는 순간적으로 ‘브레이크 스펀지 현상’과 유사한 반응을 만날 수 있다. 브레이크 페달이 스펀지를 밟은 것처럼 쑥 들어가는 듯해 당황할 수 있다. 익숙해 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늘어난 휠베이스는 어디로 갔을까?
더 뉴 EQE의 휠베이스는 3,120mm다. 10세대 E-클래스(E-Class, W213)보다 180mm가 길다. 덕분에 앞좌석 숄더룸과 실내 길이가 각각 27mm, 80mm 늘어났다. 그런데 휠베이스가 180mm 길어졌는데, 실내 공간은 80mm만 늘어났다. 100mm는 어디로 갔을까?
더 뉴 EQE는 전면 유리창 아래 크래시 패드가 유난히 깊다. 늘어난 휠베이스가 이 곳에 할애된 것처럼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이유가 있다. 보닛 아래부터 크래시 패드까지 이어지는 큰 공간에는 대형 헤파(HEPA) 필터가 포함된 공기 청정 패키지가 자리잡고 있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는 알고 보면 공기질이 매우 나쁜 환경이다. 미세먼지 이슈 이후 차량내 공기질에 대한 관심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이런 시류에 맞춰 더 뉴 EQE의 보닛 아래에 대형 공기청정기를 배치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기능설명에 따르면 이 패키지는 미세먼지, 꽃가루 등 외부오염 물질을 효과적으로 걸러 주는 동시에 활성탄 코팅으로 내부 악취도 중화한다고 한다. 내 집 안방 같은 편안함을 주기 위해서는 공기질도 관리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겼고, 메르세데스-벤츠는 이를 위해 상당한 실내 공간을 양보했다.
▲자동차에 미니 게임이? 금기 아니었어?
전기차는 내연기관과 같은 배기음이 없기 때문에 주행감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속도감은 오감으로 느낄 때가 가장 짜릿하다.
벤츠는 이런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인위적인 사운드를 넣었다. 소리는 ‘실버 웨이브(Silver Waves)’와 ‘비비드 플럭스(Vivid Flux)’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비비드 플럭스가 상대적으로 더 깊고 웅장한 소리를 낸다. 물론 소리를 없애는 옵션도 있다.
벤츠는 특별한 전기차 사운드를 만들어내기 위해 물리학자와 음향 디자이너, 미디어 디자이너 같은 다양한 분야의 음향 전문가와 협업했다고 한다.
‘더 뉴 EQE’에는 또 하나, 센터페시아의 12.8인치 OLED 터치 디스플레이에서 즐길 수 있는 미니 게임이 들어 있다. 정차시에 간단히 즐길 수 있는 ‘스도쿠’ ‘셔플퍽’ ‘짝맞추기’ 게임이 기본으로 깔렸다.
예전 같으면 자동차 엔지니어들이 펄쩍 뛰며 반대할 콘텐츠다. 운전자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릴 수 있는 기능은 금기시하던 게 예전 분위기다. 아직은 아주 기초적인 게임이지만 프리미엄 비즈니스 세단에 실렸다는 사실이 엄청난 도전이다.
메르세데스-벤츠 ‘더 뉴 EQE 350+’가 웅변하는 명제가 더욱 뚜렷해졌다. 자동차는 이제 상식을 다시 써야한다고.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