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도 깊이도 알 수 없는 물길을 발밤발밤 헤치고 간다. 출렁이는 물결이 전방을 비추는 카메라를 날름거리며 희롱한다. 흐르는 강물 따라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는 이 주체는 일엽편주 조각배가 아니다. 대당 가격이 가볍게 2억 원이 넘어가는 럭셔리 SUV다.
이 질문을 아니할 수 없다. ‘럭셔리’란 무엇인가? 모습이 화려하기 그지없어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호사스러움을 느끼는 때 우리는 ‘럭셔리’라고 한다. 그런데 돌부리도 아랑곳 않고 비탈도, 언덕배기도 예사롭지 않게 여기며, 속을 알 수 없는 물길조차 주저없이 타고 흐르는 이 주인공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럭셔리’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로빈 콜건 재규어 랜드로버코리아 대표는 이 차를 “드라이버스 카(driver's car)와 쇼퍼 드리븐(Chauffeur-driven)을 모두 충족하는 럭셔리 SUV”라고 소개했다. 럭셔리를 자처하는 브랜드들이 흔히 하는, 입에 발린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막상 미디어 시승 행사에 와 보니 출렁거리는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로맨스를 운전기사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흔한 ‘럭셔리’와는 다른 그 무엇이 있어 보인다.
1970년에 첫 선을 보인 레인지로버는 처음부터 럭셔리 SUV를 외치며 나왔다. 그 때 말한 ‘럭셔리’의 정의를 보자. “우아한 디자인과 최상의 편안함과 여유로움, 그리고 모든 길을 정복할 수 있는 독보적인 주행성능”이 레인지로버가 보여주고자 한 ‘럭셔리’였다. 지문이라도 남을까 봐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 럭셔리와는 다른 종류다. ‘럭셔리카’의 진정한 가치는 ‘모든 길을 정복할 수 있는 독보적인 주행성능’에 있다고 봤는지 모르겠다. 50년 이상 럭셔리 SUV 시장을 선도할 수 있었던 비결일 지도 모른다.
▲ 럭셔리란? 럭셔리 디자인이란?
디자인에서도 ‘럭셔리’는 레인지로버 답게 해석돼 있다. 레인지로버의 ‘모던 럭셔리’는 단순함의 아름다움이다. 레인지로버가 자랑하는 매끈한 라인은 단 3개의 선으로 설명이 된다. 측면 중앙을 길게 가로지르는 웨이스트 라인, A 필러에선 높다가 후미로 갈수록 낮아지는 루프라인, 치맛단 들어올리듯 끝이 살짝 들린 하단부 실라인이 전부다. 굳이 하나를 더 찾자면 3세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A필러 아래쪽에 세로로 새겨진 ‘시그니처 사이드 그래픽’ 정도다.
이번 5세대 ‘올 뉴 레인지로버’의 모던 럭셔리는 한 발 더 나아가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몇 안 되는 선만 선명해졌고, 차체와 보닛, 차체와 차문 사이의 이음새는 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졌다. 물샐틈없다고 할 만큼 단차가 느껴지지 않는다. 5세대 모델의 셔트라인(차량의 두 패널 사이의 간격)은 이전 세대 대비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의 정교함은 공기역학적 효율로 이어졌다. 공기저항 계수 0.30Cd는 대형 SUV에서는 수준급이다. 루프라인을 10mm 낮춘 것도 기여했다.
재규어 랜드로버코리아가 이번에 출시한 모델들은 전부 내연기관 전용이다. 배기량 3.0리터짜리 I6 디젤엔진과 배기량 4.4리터짜리 V8 가솔린엔진을 장착했다. 각각은 다시 스탠다드 휠베이스와 롱 휠베이스 모델로 나뉘어진다. 롱 휠베이스 가솔린 모델은 7인승을 하나 더 두었다.
가장 가격이 싼 스탠다드 휠베이스 디젤 모델(D350)이 2억 397만 원이고, 가장 비싼 롱 휠베이스 가솔린 5인승 모델(P530)이 2억 3,047만 원이다.
기대했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은 순차적으로 출시된다. P510e PHEV 모델은 3.0리터 I6 인제니움 가솔린 엔진과 38.2kWh 리튬 이온 배터리, 105kW 전기 모터가 결합돼 전기 에너지만으로 WLTP 기준 최대 113km에 이르는 거리를 주행할 수 있다. 랜드로버 ‘리이매진’ 전략에 따라 PHEV 모델은 2023년, BEV 모델은 2024년 출시 예정이다.
▲ 내연기관부터 전기차가 한 뿌리, MLA-Flex 플랫폼
올 뉴 레인지로버에는 내연 기관부터 순수 전기 파워트레인까지 모두 적용할 수 있는 유연성이 돋보이는 MLA-Flex(Modular Longitudinal Architecture-Flex) 아키텍처가 최초로 적용됐다. MLA-Flex는 80%가 넘는 알루미늄을 포함한 특수 합금을 적재적소에 적용해 강도를 높인 브랜드 역사상 가장 견고한 차체 구조다. A, C 그리고 D 필러의 차체 구조 내에 3개의 링을 만들어 무게와 강성을 최적화해 기존 모델 대비 최대 50% 향상된 33,000Nm/deg에 달하는 비틀림 강성을 갖췄다. 강철로 제작된 벌크헤드는 노면에서 전해지는 소음과 진동을 기존 모델 대비 24% 감소시켜 정숙성을 높였다.
미디어 시승행사에는 때가 때이니만큼 가솔린 모델만 동원됐다. 힘은 수치상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지만, 8단 자동변속기와 맞물려 정교하게 세팅됐기 때문에 움직임은 더없이 부드러워 컨트롤에 부담이 없다.
올 뉴 레인지로버 P530 모델에는 랜드로버 최초로 최고 출력 530PS을 쏟아내는 4.4리터 V8 가솔린 엔진을 탑재했다. 최대토크도 76.5kg·m나 돼 다이내믹 런치를 작동하면 정지상태에서 100km/h까지 가는데 4.6초면 된다. 최고 속도는 250km/h이다. 다이내믹 런치는 특별히 가동 버튼이 있는 건 아니고, 작심하고 액셀러레이터를 딸깍 소리가 날 때까지 콱 밟으면 작동된다. 실생활에서 크게 쓸 일은 없겠지만 풀가속을 하면 무서운 속도로 뛰쳐나간다.
터보 래그를 줄이는 방책으로는 응답이 빠르고 효율이 높은 트윈 스크롤 터보를 배치했다. V형에 하나씩 2개의 병렬 트윈 스크롤 터보를 달았다.
이 엔진은 오프로드에서도 막힘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특별한 구조가 필요했다. 오프로드 주행 시 45도 회전각을 처리할 수 있도록 특수 설계됐으며, 최대 900mm 깊이까지의 강을 건너도 엔진이 꺼지지 않도록 맞춤형 공기 흡입구를 배치했다.
▲ 90cm 물을 건너다
90cm 물은 사람이 맨몸으로 들어가도 공포가 느껴지는 깊이다. 도강을 시도하기 전에 운전자는 차량 모드를 바꿔주는 설정이 필요하다. 재규어 랜드로버코리아가 마련한 미디어 시승 프로그램에서도 도강 체험이 단연 하이라이트였다.
도강 모드는 변속기 우측에 모드 설정 다이얼로 선택할 수 있다. 다이얼을 돌리면 운전자의 몸이 알아챌 정도로 차체에 다이내믹한 변화가 생긴다. 컴포트, 다이내믹, 에코, 잔디/자갈/눈길, 진흙, 모래, 암석, 도강 모드를 다이얼 하나로 선택할 수 있다.
도강모드에서는 에어 서스펜션이 차체를 최대 135mm까지 높이며 강을 건널 준비를 한다. 이 모드가 작동되면 변속기의 출력을 구동축에 전달하는 '드라이브 라인'을 잠그고 엔진에 들어가는 공기 흡입구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위치를 높인다. 드라이브 라인을 잠그는 것은 바퀴가 앞 또는 뒤 2개만 움직일 경우 물에서 접지력이 떨어질 수 있어 접지력을 높이기 위함이다.
또 하나, 도강 모드에서는 차량 곳곳에 비치된 전자눈으로 운전자의 시선을 보완할 수 있다. 피비 프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의 도강 감지 화면을 활성화하면 운전자가 카메라를 통해 수심까지 확인할 수 있다. 성능 좋은 3D 서라운드 카메라는 4개의 서라운드 카메라의 이미지를 스마트하게 결합해 360도, 3D 외부 투시 영상을 보여준다. 도로 경계석 뷰나 교차로 뷰도 보여주는데 16km/h 미만의 오프로드와 온로드 주행에서 작동해 운전자의 시선을 보조한다.
▲ 힙합도 추겠네, 드라마틱한 에어 서스펜션
완전히 독립적인 에어 서스펜션은 차량 실내를 노면 상태로부터 분리시키는 드마틱한 변화를 체험하게 해준다. 트윈 밸브 댐퍼가 탑재된 에어 스프링 볼륨으로 구성되는 올 뉴 레인지로버의 에어 서스펜션은 차체의 높이를 4단계로 조절한다.
승하차시에는 차체를 50mm를 낮춰주고, 오프로드 주행 시에는 기본 75mm에 추가로 60mm를 더 높일 수 있게 했다. 최대 135mm를 높이고 나면 900mm 강물도 두려움 없이 건널 수 있다. 에어 서스펜션은 고속 주행에서도 작동한다. 흔히 ‘착 가라앉는다’고 말하는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는데 시속 105km 이상으로 달리면 차체가 16mm가 낮아지면서 안정성을 높인다.
디젤 모델인 D350에는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MHEV) 시스템이 들어갔다. 감속과 제동 시 손실되는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가속 시 엔진을 보조하는 용도로 쓰인다. 이는 스톱-스타트 시스템에 비해 최대 5% 높은 효율성을 제공한다. D350 엔진의 최고 출력은 350PS, 최대 토크는 71.4kg·m이며 0-100km/h 가속 시간은 6.1초다.
가솔린, 디젤 모델 공히 올 휠 스티어링(All-Wheel Steering) 기능이 탑재됐다. 앞뒤 조향이 각기 이뤄지는 기능이다. 최근 럭셔리를 자부하는 차량과 차급에는 이 기능이 애용되고 있다. 덩치는 커졌지만 회전반경은 오히려 줄어드는 마법을 느낄 수 있다.
전기로 작동되는 리어 액슬은 최대 7.3도의 조향 각을 제공하며, 저속에서 리어 액슬을 앞바퀴와 반대 방향으로, 고속에서는 동일한 방향으로 회전시킨다. 랜드로버 모델 중 가장 낮은 11m 미만(스탠다드 휠베이스 기준)의 회전반경을 그린다.
▲ 스피커 달린 헤드레스트, 고요한 안식처
실내는 더없이 고급스럽다. 최고급 소재와 웰빙에 초점을 둔 직관적인 기술들이 운전자를 편안하게 한다. 엔지니어들은 이 공간을 ‘고요한 안식처’라 불렀다. 외부의 소음이 차단되도록 틈새 곳곳을 밀폐했을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들어오는 소음은 스피커에서 발행하는 전파로 사람이 느끼지 못하도록 상쇄시켜버렸다.
1, 2열 좌석의 헤드레스트에는 한 쌍의 60mm 스피커가 각각 달려 있다. 용량은 작지만 이 스피커는 하이엔드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과 동일한 기술이 들어갔다. 탑승자의 귀에 가장 가까운 스피커가 실내 소음을 무력화시키는 첨병 노릇을 한다. ‘내 귀에 속삭이는 캔디’는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1,600W 메리디안 시그니처 사운드 시스템(Meridian Signature Sound System)이 3세대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 시스템(Active Noise Cancellation)과 협업해 만들어내는 소리는 콘서트홀처럼 풍부하고 깊다.
시트 배열에서는 테일게이트가 인상적이다.
레인지로버는 전통적으로 분할형 테일게이트를 쓴다. 올 뉴 레인지로버는 분할된 하부 테일게이트에 ‘아웃도어 시트’라는 낭만적인 임무를 부여했다. 경치 좋은 포인트에 차를 세우고 테일게이트를 열면 불멍, 물멍, 경치멍을 할 수 있는 이동형 시트가 만들어진다.
▲ 테일게이트에서 즐기는 낭만 '경치멍'
테일게이트 안쪽 바닥면에는 특별한 장치가 있는데, 파티션을 회전시키면 바깥을 볼 수 있는 등받이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이를 안쪽으로 회전시키면 트렁크 바닥의 작은 물건들이 굴러다니지 않도록 공간을 구분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다.
미디어 시승행사에서는 올 뉴 레인지로버를 몰고 강원도 인제의 박달고지에 올라 멀리 인제 읍내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다. 피비 프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서 테일게이트 이벤트 스위트를 활성화했더니 테일게이트 안쪽의 테일게이트 전용 스피커가 음악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눈이 시린 경치 앞에 귀까지 호강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 한 쌍의 원앙같은 샤크테일 안테나
올 뉴 레인지로버의 후미쪽 지붕에 달린 샤크테일 안테나도 모양이 특이하다. 보통은 샤크테일이 한 개가 달려 있는데, 올 뉴 레인지로버는 한 쌍이 금실 좋게 달려 있다.
각기 구실이 다르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라디오 안테나다. 나머지 하나는 쓰임새가 완전히 다르다. 70 개 이상의 전자 모듈에 대한 업데이트를 설치하는 데이터수신 안테나다.
랜드로버는 이 기술을 SOTA(Software-Over-The-Air)라고 부른다. 무선 데이터수신 시스템 정도로 풀어 쓸 수 있겠다. SOTA 기술을 통해 운전자는 서비스센터에 방문하지 않고도 70 개 이상의 전자 모듈을 업데이트 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2개의 eSIM을 탑재하고 있어 음악을 스트리밍 하는 중에도 간섭 없이 SOTA(Software-Over-The-Air) 업데이트할 수 있다.
피비 프로(PIVI Pro)는 스마트폰에서 영감을 받은 인터페이스와 최신 소비자 기술을 응용해 차량을 직관적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설계했으며, 최신 LTE 모뎀 2개와 퀄컴의 최첨단 스냅드래곤 820Am 프로세서를 탑재했다. 고성능 스마트폰 수준의 반응속도가 나온다.
티맵 모빌리티의 T맵 내비게이션을 기본으로 탑재해 별도의 스마트폰 연결 없이도 T맵 사용이 가능하게 한 것도 우리나라 소비자들에겐 반가운 일이다.
시승기를 마무리하며 돌이켜 보니 차를 소개한 게 아니라, 미래 자동차에서 꿈꾸던 럭셔리 라이프를 묘사한 듯하다. 그렇다면 서두에 제기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럭셔리 차란, 럭셔리한 라이프를 실현 가능하게 해 주는 주체는 아닐까?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