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는 득의양양했다. 통일 제국을 이뤘던 진을 무너뜨렸으니 그럴 만했다. 한껏 도취한 기분에, 공을 세운 군벌과 측근에게 천하를 나눠 줬다. 제 뜻에 따른 분봉이었다. 18제후의 형식을 취한 논공행상이었다. 자신은 스스로 서초의 왕이 됐다. 초패왕의 시대가 열리는가 했다.
항우는 독단을 내렸다. 서초의 도성을 초의 근거지인 팽성으로 정했다. 모두가 간했다. “제일의 생산력을 갖춘 관중 평야를 안은 데다 전략적 요충지인 함양을 도외시하고 한쪽에 치우친 팽성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해선 안 된다.” 지극히 합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간쟁이었다.
항우는 고집불통이었다. “공을 세우고 고향에 돌아가 자랑하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고 밤에 돌아다니는 꼴[錦衣夜行·금의야행]로서 누가 알아주겠는가? 비단옷을 입었으면 마땅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錦衣還鄕·금의환향].”
고사성어 금의환향의 유래다. 애초엔 전략적 우를 범한 항우의 전단에서 비롯한 말이어서, 부정적 뜻이 강했다. 불과 수년 뒤 자기가 한왕으로 책봉한 유방과 천하를 다툰 초한 전쟁에서 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던 비운의 시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지금은 긍정적으로 쓰인다. 곧, 출세해 고향에 돌아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통용된다.
손흥민, 3전4기 본무대에서 시원한 골을 고국 팬에게 선사 기대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축구 스타 손흥민(30·토트넘 홋스퍼)이 금의환향한다. 전 세계 으뜸의 무대로 평가받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를 평정한 그 자랑스러운 모습을 고국 팬들에게 선보인다. 지난 5월 막을 내린 EPL 2021-2022시즌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득점왕에 등극한 그의 풍모를 우리나라에서 접할 수 있는 무대가 펼쳐진다.
손흥민 홀로 오지 않는다. EPL 명가(名家) 토트넘과 함께 모국 땅을 밟는다. 2021-2022시즌 후반 질주를 이끌어 4위 역전극을 연출하는 데 주인공으로 열연한 그가 줄곧 EPL 둥지로 삼아 온 토트넘이다. 이른바 ‘손흥민과 아이들’이다. 당연히 그와 완벽한 호흡을 이루는 ‘환상의 짝꿍’ 해리 케인(29)도 같이 온다.
손흥민은 2021-2022시즌 다시 한번 거듭나며 토트넘의 버팀목으로 떠올랐다. EPL 득점왕 등정을 바탕으로 토트넘이 명가의 자존심을 다시 곧추세우는 데 중추가 됐다. 빼어난 길라잡이 역으로 토트넘을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로 이끌었다. 그의 이끎을 받아 3년 만에 ‘꿈의 무대’ UCL에 다시 나가게 된 토트넘으로선 앞에 내세우고 자랑하고 싶은 존재인 손흥민이다. 토트넘이 이영표가 뛰던 2005년 피스컵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 투어’에 나선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손흥민은 또한 토트넘의 찬란한 득점왕 역사에 빛을 더했다. 2021-2022시즌, EPL 득점왕 최다 배출 클럽에 걸맞은 빼어난 발자취를 남겼다. 토트넘의 열세 번째(풋볼리그 1부 포함) 득점왕에 오르며 클럽의 성가를 더욱 드높였다. 토트넘은 바비 스미스(1957-1958시즌)를 필두로 손흥민까지 8명의 득점왕이 나오며 확실한 명가로 자리매김했다. 2회 이상 득점왕에 오른 골잡이도 지미 그리브스(4회)와 해리 케인(3회) 등 두 명이나 된다.
손흥민과 아이들은 두 차례 무대에 올라 축구 본향의 진수를 보인다. 오는 13일 오후 8시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 데뷔전을 치른다. 상대는 K리그 올스타 격인 팀 K리그다. 사흘 뒤인 16일 오후 8시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선, 한국 투어 제2막을 연다. 상대는 스페인 라리가의 명문 세비야다.
‘손흥민의 금의환향’으로 일컬을 수 있는 이번 무대는 사실 네 번째다. 그동안이 리허설 무대였다면, 이번은 본무대다. 2008년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 SV 유소년팀에 입단하며 해외에 진출한 그는 그동안 세 번 소속 팀과 함께 고국 무대에 오른 바 있다. 2012 피스컵엔 함부르크와, 2014년엔 역시 같은 분데스리가의 바이어 04 레버쿠젠과 각각 같이 한국을 찾아 수준 높은 독일 축구를 선보였다. 손흥민은 ▲ 2012년 피스컵에선,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흐로닝언(2-1 승리)과 성남 일화(0-1 패배)와 ▲ 2014년 친선 경기에선 FC 서울(0-2 패배) 등 모두 세 차례 경기에 출전해 분데스리가에서 갈고닦으며 성장한 플레이를 보여 고국 팬을 흐뭇하게 했다.
21세기 들어 유러피언 코리안리거가 고국을 찾아 무대에 오른 적은 상당수 있었다. 2003년 6월 송종국(네덜란드 페예노르트)을 시작으로, 같은 해 7월 박지성·이영표(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 2005년 이영표(토트넘) 이천수(스페인 레알 소시에다드)가 뒤를 이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모국의 품에서 유럽 축구의 진수를 고국 팬에게 선사했다.
2007년, 박지성은 EPL 최고 구단(이하 당시)의 위상을 굳게 다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함께 다시 내한했으나, 부상으로 경기엔 나서지 못했다. 2009년, 박지성은 다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함께 조국을 찾아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FC 서울과 치른 친선 경기에 모습을 보였다.
2008년엔 설기현(EPL 풀럼), 2012년엔 석현준(흐로닝언)이 각각 향수 어린 고국 땅의 친숙한 팬 앞에서 일취월장한 솜씨를 펼쳐 보였다.
이처럼 많은 내한 경기에서, 유러피언 코리안리거가 골맛을 본 적은 별로 없다. 송종국, 박지성(2003년), 석현준 등 세 차례밖에 연출되지 못했다.
손흥민도 지금까지 오른 세 번의 예비 무대에서 골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본무대에서만큼은 다르다. 세계 최고 골잡이의 하나로 우뚝 선 그는 멀리 떨어진 고국에서 자신을 열렬히 성원하는 팬들에게 멋진 골을 선사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손흥민이 골 가뭄을 시원하게 씻어 낼 그 날 그 땅에, 팬들의 마음은 벌써 달려가 있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