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마음대로 찍으세요. 조립 라인에 바짝 다가가도 상관없습니다.”
폭스바겐그룹의 핵심 전기차 모델이 생산되고 있는 하노버 공장과 츠비카우 공장은 한국 취재진에게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이 차체와 결합되는 조립라인에서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공정은 없었다.
다만 사진 촬영시에는 사전에 인솔자에게 먼저 말을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 인솔자는 조립라인에서 조업 중인 근로자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확인했고, “괜찮다”는 답이 오면 무한 촬영이 허용됐다. 사진 촬영 전에 묻는 것은 조립라인의 기술 보안 때문이 아니라 보도 사진에 근로자의 얼굴이 나와도 괜찮은 지 여부를 묻는 절차 때문이었다. 취재진은 근로자들의 조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폭스바겐그룹의 최신 플랫폼이 차체와 결합하는 과정은 물론, 그들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었다.
이 장면은 폭스바겐그룹의 플랫폼 정책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었다. 인솔 책임자에게 물었다. 폭스바겐그룹의 핵심 기술인 최신 플랫폼을 이렇게 다 보여줘도 괜찮냐고. 돌아온 답은 “우리는 이미 포드에 폭스바겐 플랫폼을 공급하고 있다. 협업을 원하는 브랜드가 있다는 우리는 누구와도 머리를 맞댈 수 있다”고 말했다. 수천억 원을 투자해 개발한 플랫폼도 원하는 브랜드가 있다면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다는 자세다. 이 또한 폭스바겐그룹의 ‘뉴 오토(NEW AUTO)’ 전략의 일환이다.
폭스바겐그룹은 현재 4개의 전기차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다. 2020년과 2021년, 아우디 e-트론을 출시하면서 ‘MLB 에보(evo)’를, 아우디 e-트론 GT 콘셉트와 포르쉐 타이칸을 개발하면서 스포츠 전기차 전용 ‘J1’ 플랫폼을 만들었다. 나아가 아우디의 중형급 전기차 ‘Q4 e-트론’ 콘셉트를 개발할 때는 모듈형 전기차 전용 플랫폼 ‘MEB(Modular Electric Drive Toolkit)’를 선보였고, 프리미엄 전기차 전용 ‘PPE’도 개발했다. 긴 주행거리와 여유로운 공간을 제공하는 MEB는 다양한 모델에 적용돼 폭스바겐그룹의 전동화 시대를 열 바탕이 된다.
왜 이렇게 많은 플랫폼을 개발했을까?
한국 취재진이 독일 볼프스부르크에 있는 폭스바겐 R&D 부문 e-모빌리티 테스팅 센터를 찾았을 때, 안드레아스 월링겐(Andreas Walingen) 폭스바겐 승용차 브랜드 부문 최고전략책임자(CSO)는 “폭스바겐그룹은 플랫폼 혁신을 추구하면서 두 가지 축을 유지했다. 하나는 대중화 기반의 폭스바겐 차량용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우디와 포르쉐처럼 프리미엄 퍼포먼스 경험에 초점을 둔 차량용이었다. MEB와 프리미엄 전기차 플랫폼(PPE), 두 가지 플랫폼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 폭스바겐그룹의 공격적인 전동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끝난 게 아니었다. 폭스바겐그룹은 새로운 확장형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확장형 시스템 플랫폼(SSP, Scalable Systems Platform)이 2026년 양산을 목표로 개발 중이다. SSP는 차세대 전기차 전용이자 완전히 디지털화된, 고도로 확장가능한 메카트로닉스 플랫폼이다. 폭스바겐그룹은 다양한 플랫폼을 하나의 SSP 아키텍처로 통합해 복잡성과 개발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인다는 방침을 세웠다. 향후 그룹 산하 전 브랜드의 모든 세그먼트 모델은 SSP에 기반해 차량을 생산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 플랫폼으로 생산될 차량이 수명주기 기준 4,000만 대에 이를 것으로 폭스바겐그룹은 예상하고 있다.
아우디는 몇 해 전 미래차 개발을 위한 ‘아르테미스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이 프로젝트에서 생산될 차가 2025년 최초로 SSP 모듈을 사용할 예정이다. 아우디와 비슷하게 트리니티(Trinity)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폭스바겐은 2026년 대량생산 모델에 처음으로 SSP 기술을 적용할 계획이다. MEB와 마찬가지로 SSP 또한 다른 자동차 제조기업들에 공개될 예정이다.
이런 계획에 대해 안드레아스 월링겐 CSO는 “폭스바겐그룹의 MEB와 PPE는 전동화 모델들을 볼륨 또는 프리미엄 세그먼트로 다변화해 나갈 것이지만, 향후 SSP라는 하나의 아키텍처로 통합된다. 모델에 관계없이 동일한 아키텍처가 사용된다면 복잡성과 개발 비용을 줄여 거대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동일한 아키텍처를 공유하더라도 소프트웨어를 통해 차량별로 다양한 기능을 제공함으로써 차별화를 꾀할 것이다”고 말했다.
폭스바겐의 트리니티(Trinity) 프로젝트는 폭스바겐그룹의 SSP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단어 ‘트리니티’에서 이름을 따온 이 프로젝트는 차량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새로운 생산방식 등 세 부문의 완벽한 통합을 목표로 한다. SSP를 기반으로 개발될 폭스바겐 차량은 소프트웨어로 운전자와 브랜드를 긴밀하게 연결하고, 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OTA)를 통해 새로운 모빌리티 경험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또한 트리니티 프로젝트는 레벨 2 이상의 자율주행을 시작으로 향후 레벨 4 수준의 자율주행까지 구현한다. 연간 약 600만대의 차량을 판매해 자율주행 규모를 확대하고, 규모의 경제를 통해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해 자율주행 기술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 나갈 예정이다. 2026년의 트리니티 프로젝트는 차량 네트워크를 통해 교통상황 및 장애물, 교통사고와 같은 데이터를 다른 차량과 교환할 수 있는 셀프 러닝 시스템도 구축하게 된다.
폭스바겐 SSP 플랫폼 및 트리니티 프로젝트 총괄을 맡고 있는 주키 테튼본 박사는 “현재 폭스바겐그룹은 총 다섯 개의 아키텍처와 다섯 개의 운영체제를 보유하고 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복잡성을 줄이고자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운영체제를 개발하고, 이를 그룹의 모든 브랜드에 적용하는 것이 목표다. 자율주행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도 또 하나의 예시라고 할 수 있다”고 한국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제 폭스바겐그룹의 플랫폼 전략이 명확해졌다. 고도의 기술력이 동원돼 개발되는 플랫폼이지만 개발된 플랫폼을 그룹 내에 가둬 두지 않기로 했다. 그룹내 모든 차종을 확장형 플랫폼으로 통합할 뿐만 아니라 다른 브랜드에게 적극적으로 공개하기로 했다.
이런 전략은 폭스바겐그룹의 ‘소프트웨어 기업화’ 선언과도 맥을 같이 한다. 차의 성격이 하드웨어로 결정되는 시대를 지나 소프트웨어가 차를 지배하는 시대를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폭스바겐그룹이 ‘카리아드’라는 소프트웨어 자회사에 힘을 실어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프트웨어로 차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아키텍처가 필수적이다. SSP가 전세계 자동차의 지배적 아키텍처가 된다면 세계 자동차 환경은 ‘카리아드’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폭스바겐그룹의 ‘탈 하드웨어’ 전략은 ‘안드로이드’를 앞세운 구글의 스마트폰 전략과 닮았다. 구글은 ‘아이폰’처럼 지배적인 하드웨어는 없지만 ‘안드로이드’로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OS를 아이폰의 iOS와 양분하고 있다.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