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난 배우 최은희에 많은 이들이 애도를 보내고 있다.
고인은 지난 16일 오후 5시 30분경 별세했다. 고인의 장남 신정균 감독에 따르면 이날 최은희는 병원에 신장투석을 받으러 갔다가 세상을 떴다. 고인은 십여 년 전, 허리 수술을 받은 뒤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받아왔고, 이날도 평소처럼 병원에 신장투석을 받으러 갔다 상태가 악화돼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전설적인 배우 최은희. 그는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은막의 여왕이다.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이후 영화 '새로운 맹서'(1947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상록수'(1961) '빨간 마후라'(1964) 등에 출연하며 한국영화사의 전성기를 이끌고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남편인 고 신상옥 감독과 함께 1960~70년대 영화계를 이끌면서 76년까지 130여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이후 1978년,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남편 신상옥 감독과 북한으로 납북됐다가 8년 만에 탈출하면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 고인을 홍콩으로 초청한 사람은 한국의 한 영화사 홍콩지사장으로, 알고보니 북한 공작원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최은희는 몇 개월 뒤 역시 함께 피랍된 남편 신상옥 감독과 영화를 제작하며 1986년, 망명하기 전까지 북한에서 삶을 보냈다.
이와 관련해 AFP 통신은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 영화 산업발전에 집착한 나머지 1978년 남한의 유명감독인 신상옥과 그의 부인 배우 최은희를 납치했다. 납치된 두 사람은 8년 동안 북한에 머물며 체제 선전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1986년에 가까스레 탈출해 회고록을 쓰기도 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말그래도 목숨을 건 영화 인생이었다. 최은희는 이와 관련해 한 인터뷰에서 "지금도 악몽에 시달린다"라고 당시의 끔찍했던 기억을 토해내며 납치를 명령했던 김정일에 대해 "남편과 나를 이용해 북한의 낙후한 영화계를 일구려 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죽는 날까지 영화를 사랑한 열정의 여인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꾸준히 연기 활동을 이어오며 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내 왔다. 그는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을 연출한 우리나라의 세 번째 여성감독이자 언제나 위상과 품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여배우였다.
지난 2010년 10월 열린 제 47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최은희는 대종상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당시 모든 후배 배우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휠체어를 타며 불편한 몸으로 자리한 최은희는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나오게 돼 송구스럽고 부끄럽습니다. 17살 소녀시절에 연예계에 입문해서 연극으로 라디오드라마로 TV드라마로 영화에서 한평생 오로지 한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배우로서의 위상과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라고 전하며 “이렇게 저를 잊지 않고 성원해주시는 팬들과 우리 영화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상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감사를 드립니다. 6,70년대 우리 영화가 전성기에 있을 때, 열심히 했는데 요즘에 후배들이 한류붐을 일으키고 있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한국영화가 더욱 발전하길 바랍니다”고 여운 남기는 소감을 밝혔던 바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19일 오전이다. 장지는 안성천주교공원묘지. /nyc@osen.co.kr
[사진] OSEN DB, 영화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