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구가 투수의 허벅지를 직격했다. 공에 맞은 문광은(SK)은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선수보호차원에서 교체가 결정됐다.
문광은이 책임지기로 했던 이닝을 누군가가 소화해야 했다. 그때 이날 등판이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한 선수가 조용히 불펜으로 향했다. 베테랑 우완 채병용(36)이었다. 갑작스러운 출격 대기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내색 없이 몸을 풀었다. 정작 다음 투수 서진용이 1⅔이닝을 막아 채병용은 출전 기회조차 없었다. 등판을 하지 못해 워밍업이 허사가 됐지만 채병용은 담담했다. 그냥 “이게 내 운명”이라고 했다.
SK의 왕조를 이끈 투수들은 이제 대부분 팀을 떠났거나 은퇴했다. 왕조의 처음과 끝을 모두 본 투수 중 SK에 남아있는 불펜투수는 사실상 채병용이 유일하다. 그는 리그 최고의 마당쇠였다.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KBO 리그 418경기에 나갔다. 팀이 필요할 때 항상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워낙 좋은 체력과 노하우, 그리고 확실한 기량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채병용은 최근 2년 사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불펜으로 완전히 돌아선 2016년은 엄청난 활약이었다. 68경기에서 무려 83⅔이닝을 던지며 6승3패2세이브9홀드 평균자책점 4.30을 기록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부진했다. 43경기에서 50이닝 동안 6승4패6홀드 평균자책점 6.84에 그쳤다. 확실한 불펜 필승조로 채병용을 지목했던 SK 코칭스태프도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나이에 따른 노쇠화인지, 2016년 많은 등판의 후유증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이제 더 발전하기는 쉽지 않은 나이다. 지난해와는 다르게, 후배들과의 경쟁에서 우선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는 채병용도 인정한다. 채병용은 “내가 더 발전할 수 있는 부분은 구속 하나 정도인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것 같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쌓이고 쌓인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이 경쟁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월의 무게만큼, 채병용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와 경기운영능력, 위기관리능력은 후배들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쌓여있다. 몸도 잘 만들었다. 체중을 빼며 승부수를 띄우는 등 비시즌 동안 착실히 몸을 만들었다. 오키나와 캠프에서도 호투를 이어간다. 2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했다. 130㎞대 중반의 구속이지만 묵직한 공끝은 아직 살아있다.
연습경기마저 궂은일이다. 2월 26일 롯데와의 경기에서는 앞선 투수 정동윤의 투구수가 많아지자 이닝 중간에 마운드에 올라 1⅓이닝을 책임졌다. 3월 2일 KIA와의 경기에서도 선발 메릴 켈리가 예정된 2이닝을 소화하기도 전 한계 투구수가 걸리자 역시 이닝 중간에 등판, 1⅔이닝 무실점 호투로 달아오른 KIA의 방망이를 잠재웠다. 채병용의 가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팀이 필요할 때, 채병용은 언제든지 불펜으로 향할 각오가 되어 있다.
2018년 프리뷰
팀 내 불펜에 우완 정통파가 많아 경쟁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확실한 장점도 가지고 있어 경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언제든지 1이닝 이상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경기운영능력은 접전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지난해 다소 처졌던 구위를 2016년 수준으로만 회복할 수 있다면 이만한 카드를 찾기도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FA 3년 계약의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내년부터는 계약 기간이라는 방패가 없다. 2018년 성적이 중요한 이유인데, 돌려 말하면 절박한 채병용의 반등을 기대할 수 있다. /skullboy@osen.co.kr
[사진] 오키나와=박준형 기자 /soul1014@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