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kt 마운드의 신데렐라는 단연 고영표(27)였다. 첫 경기 구원등판한 그는 이후 줄곧 선발투수로 나섰다. 25경기(24경기 선발) 141⅔이닝 소화 8승12패, 평균자책점 5.08. 언뜻 특출나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직전 시즌까지 불펜투수로만 뛰던 선수가 꾸준히 로테이션을 돌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고영표는 평소에도 진중한 성격으로 알려져있다. 독서를 즐기는 성향답게 단어 하나에도 자신의 철학을 힘주어 담았다. 고영표의 야구관과 팬들의 대한 생각은 어떨까.
# 나에게 2017년은 '시작이자 재발견'
- 스스로의 2017년을 돌아본다면?
▲ 첫걸음이었다. 시작이자 재발견으로 표현하고 싶다. 선발로 전환한 첫 시즌이었다. 성공 가능성은 미지수였지만 자신 있었다. 생각대로 좋은 결과가 나왔다.
- 선발 전환을 어려워하는 투수들도 있다.
▲ 개인적으로는 중간 계투보다 선발이 더 맞을 거로 생각했다. 선발로 6이닝 책임지려면 변화구나 무브먼트, 제구력이 중요했다. 내 경우 체인지업이 큰 역할을 했다. 중간계투로는 더 빠른 구속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발이 더 잘 맞을 거로 생각했다.
- 규정이닝과 10승 달성 모두 실패했다. 만약 달성했다면 두 기록 모두 kt 최초였다.
▲ 구단이 바라는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고 싶다. 이를 위해서라면 최초 기록을 챙기고 싶었다. 하지만 승리야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따라오는 선물일 뿐이다. 8승도 만족한다. 라이언 피어밴드도 8승이다. 이닝을 더 많이 소화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 연봉 121% 상승의 기쁨을 맛봤다.
▲ 매년 연봉 협상 때마다 '잘해서 대우 받자'는 생각을 했다. 올해는 확실히 만족스러웠다. 입금이 안 돼서 실감은 안 난다. 그저 하던 야구를 계속할 뿐이다. 들뜨진 않는다.
# "형을 맞히더라도 내 자신에게 기분 나쁠 것 같다"
- 세이버매트릭스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 아마추어 때부터 미국 야구를 즐겨봤다. 하지만 프로 입단하면서부터는 시선이 달라졌다. '저 투수들은 어떤 매커니즘으로 던질까? 어떤 기록들을 신경쓰면서 야구할까?'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알고 싶었다. 미국에서 중시하는 숫자들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참고하는 투수가 있는지?) 맥스 슈어저(워싱턴)를 많이 따라한다. 사실 슈어저 뿐만 아니라 크리스 세일(보스턴), 잭 그레인키(애리조나), 클레이튼 커쇼(LA 다저스) 등 좋은 투수 영상은 다 참고한다. 그들의 공통점을 찾다보니, 상체 중심이동 반경이 넓었다. 나도 따라해보니 공에 무게감이 실렸다.
- 선수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기록에 대해 연구하기란 쉽지 않다.
▲ 하지만 결국 그 숫자들이 투수의 가치를 나타낸다. 심지어 몇몇 팬들은 선수나 구단 직원보다 더 많이 아신다. '이 선수는 이 기록이 높으니 곧 터질 것이다' 하는 식이다. 팬들과 구단, 동료 선수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중요한 지표가 좋다면 괜찮은 투수로 인정받을 거로 생각했다.
- 비록 규정이닝을 채우진 못했지만, 지난해 볼넷 비율 2.6%로 KBO 역사를 새로 썼다. 아울러, 삼진/볼넷 비율 7.8로 1983년 선동렬(8.4)에 이어 역대 2위를 찍었다. 본인이 가장 중시하는 기록은 무엇인가?
▲ 이닝과 퀄리티스타트다.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거나, 7이닝 이상 던지면 홀가분하다. 수비 실책으로 실점해 패전을 기록하거나 실투가 있었어도 말이다. 불펜의 부담을 덜어줬다는 의미다. 많은 분들이 탈삼진률이나 볼넷 비율을 얘기하지만 오히려 신경쓰지 않는다. 볼넷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난 잃을 게 없는 선수였다. 맞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던지니 볼넷이 적었다. 그러면서 투구 효율이 높아졌다. 달리다보니 어느새 그런 기록들이 나왔다.
- 기록적으로 보완하고 싶은 게 있다면?
▲ 몸 맞는 공과 BABIP다. 몸 맞는 공이 많았는데, 맞은 선수들에게 미안하지 않냐는 얘기를 들었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 팀에게 미안하다. 야구장 안에서는 냉정해야 한다. 설령 친형(고장혁·KIA)을 맞히더라도 마찬가지다. 경기가 끝나면 미안할지언정, 마운드 위에서는 아니다. 번번이 공 하나로 출루를 허용하면 선발투수로 자격이 없다. BABIP는 내 구위가 부족하다는 걸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물론 운이 중요한 영역이지만, 구위도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이지풍 트레이닝 코치님과 겨우내 웨이트트레이닝에 열중했다. 구위로 BABIP를 낮출 생각이다.
# kt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꿈꾼다
- 본인을 '잃을 게 없었던 선수'라고 표현했다. 바꿔 말하면, 이제는 잃을 게 생겼다는 의미 아닌가.
▲ 맞다. 하지만 거기서 한 번 더 시각을 바꾼다면, '잃을 것'을 얻었으니 자신감이 생긴다. 만일 올해 부진하더라도 조급하거나 걱정하진 않을 것이다.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게 스포츠고, 야구고, 변수다. 다만, 부진하더라도 좋았을 때처럼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변화에 도전한다면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가 남는다. 지난해는 그 결과가 좋았던 것이다. 만일 도전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고영표는 없었을 것이다.
- 지난해 도전을 스스로 평가한다면?
▲ 실패가 6이고 성공이 4였다. 실패의 6 중 무난했던 건 2 정도? 이제 그 6을 성공으로 옮겨야 한다. 지난해 더 잘했다고 해서 확 뛰어오르고 싶진 않다. 그저 한 계단씩 밟겠다는생각이다. '2018년을 특별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 하지만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이 있다. 군 미필로서는 중요한 해다.
▲ 맞다. 앞으로도 그라운드에서 팬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 군 복무를 하더라도 호흡은 이어지겠지만, 그 시간이 2년 늘어난다면 나와 팬 모두에게 행복이다. 너무 이상적인가? (웃음) 군 문제는 선발투수의 승리와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갖고 싶다고 해서 된다면 세상이 얼마나 편하겠나. 나는 그저 달리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기회가 오지 않을까. 거기에 운과 복이 따르다면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 그게 목표라면 전도된 것이다.
- 평소에도 팬 사랑이 각별하다.
▲ 좋은 투구를 할 때나. 아쉬운 결과가 나왔을 때. 팬들은 언제나 나를 응원해주신다. 마운드 위에서 여유가 생기니까 그 소리가 조금씩 들리더라. 내 야구를 보고 싶은 팬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 kt와 고영표가 함께 성장한다면 정말 좋은 그림일 것 같다.
▲ 맞다. kt라는 팀이 창단하면서 입단했다. 이 신생팀이 커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애착이 강하다. 비록 3년 연속 최하위였지만 탄탄해지고 있다. 부족하다는 얘기에는 당연히 동의한다. 하지만 최하위에서 중위권, 포스트시즌권, 한국시리즈권, 거기에 우승권까지 올라갈 것이다. 내가 그 중심에서 잘 던지고 싶다.
- 먼 미래의 얘기지만, kt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기대하는 팬들이 많다.
▲ 프랜차이즈 스타가 있으면 팬들도 더 많아질 것이다. kt가 좋다. 내가 그 프랜차이즈 스타가 된다면 더없이 영광일 것이다. kt가 정상급 팀이 되고, 나도 그 중심에서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가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 막 풀타임 첫 시즌을 치렀지만 고영표는 '끝'을 그리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kt 유니폼을 입은 프랜차이즈 스타다. /kt 담당 기자 ing@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