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 시절이나 그 이후 2000년대 들어서도 대한체육회 산하 경기단체의 수장으로 기업체 대표를 ‘모시려면’ 경선을 피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재벌 기업의 총수가 굳이 ‘품위가 손상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말썽 많은 경기단체를 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올림픽 메달이 걸려 있는 이른바 정책종목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한국 프로야구의 중심인 KBO도 마찬가지였다. 역대 총재(커미셔너)는 정권의 낙하산 인사가 자리를 잡는 게 당연시됐고, 사무총장 역시 정권의 입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결정은 으레 ‘만장일치’였다.
정치권의 간섭과 입김이 오죽 심했으면 구단주가 총재를 맡도록 대외적으로 공표까지 했을까.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이 1998년 12월 제12대 박용오 총재 때부터였다. 그 뒤 2006년에 정치인(신상우)이 다시 총재로 앉았지만 숱한 부작용만 낳았다.
물론 그 이후 지난해 말로 임기가 끝난 구본능 총재에 이르기까지 만장일치 추대는 여전히 당연시됐고, 찬성과 반대 의사를 묻는 투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추세에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 제23대 정운찬(71) 총재와 장윤호(56) 사무총장의 선임과정이었다. 정운찬 총재는 지난해 12월 29일, 장윤호 총장은 지난 1월 30일 KBO 이사회에서 선출이 이루어졌다.
사상 처음으로 총재와 총장 선출을 이사회에서 이사(구단 사장)들의 투표로 결정한 것이다.
KBO 규약에 따르면 임원의 선출은 ‘총재는 이사회에서 재적이사 4분의 3이상의 동의를 받아 추천하며, 총회에서 4분의 3이상의 찬성으로 선출’하는 것으로 돼 있고(제10조 임원의 선출①항), ‘사무총장은 총재의 제청에 의하여 이사회에서 선출’한다(제10조 ②항)고 돼 있다. 여태껏 이 당연한 인선 과정이 생략된 채 총재와 총장을 ‘맹목적 수용’ 식으로 뽑았던 관행이 이번에 비로소 깨진 것이다.
정운찬 총재와 장윤호 사무총장의 투표 결과는 밖으로 노출되지 않았으나 들리는 얘기로는 만장일치는 아니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총재와 총장의 지위가 그 정당성을 훼손당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야말로 이사들의 자발적 의사로 선출한 만큼 그 공과(功過)에 대한 공동의 책임의식을 느껴야 하고, 정운찬-장윤호 체제가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한국야구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줘야 할 것이다.
KBO 이사회가 총재와 총장 선출 과정에서 단순 거수기 노릇을 해온 것을 탈피했다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싶다. 특히 장윤호 총장 선임은 이사회에서 갑론을박이 어느 정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는 예전과 달리 이사회 안건을 통보하는 과정에서 정운찬 총재가 사무총장의 실명을 전혀 거명하지 않은 바람에 사전정보 부족으로 이사들이 충분한 검토 시간을 갖지 못한 데 따른 현상인 것으로 풀이된다.
정 총재가 사무총장 실명을 이사회 안건에 적시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여러 소문대로 정치권의 외풍에 심하게 시달렸다는 관측을 가능케 한다. 그렇지만 끝까지 ‘외압’을 물리치고 총재와 구단 사장들이 자율적인 ‘선택’을 한 것은 평가 받아 마땅하겠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이제 KBO 이사회도 절차적 합리화와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뿌리를 내리길 바란다.
/홍윤표 OSEN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