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세계랭킹 58위, 한국체대)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여정이었다. 2주 동안 행복했던 순간들이 이어졌지만 그 피로가 쌓여 결국 독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정현은 26일(한국시각) 호주 멜버른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열린 호주 오픈 4강전서 페더러에게 기권패 했다. 1세트를 1-6으로 내준 정현은 2세트 2-5 상황에서 심판에게 경기 기권 의사를 밝혔다.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정현은 2세트 2-5로 뒤지던 상황에서 메디컬 타임아웃을 요청했고 발바닥에 잡힌 물집을 치료받았다. 하지만 끝내 경기를 끝내지 못한 채 중도에 멈춰야 했다.
정현은 전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만 21세에 불과한 아시아 신예가 새해 첫 그랜드슬램 경기에서 4강까지 진출했으니 당연했다. 테니스 전설들의 찬사와 언론들의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졌다.
정현은 미샤 즈베레프(32위, 독일), 다닐 메드베데프(53위, 러시아), 알렉산더 즈베레프(4위, 독일), 노박 조코비치(14위, 세르비아), 테니스 샌드그렌(97위, 미국)를 잇따라 물리쳤다.
그랜드슬램 4강에 오르기 위해 치러야 할 5번의 경기를 잘 치러냈다. 즈베레프 형제, 조코비치라는 명성이 자자한 선수들을 물리친 덕분에 밝은 전망이 계속 됐다. 여기에는 한국 최초 그랜드슬램 4강 신화도 포함돼 있었다. 세계랭킹 20위권을 바라보며 한국 역대 최고 랭킹도 약속됐다.
하지만 정현은 투어 레벨에서의 경험이 미천했다. 실제 정현은 이날 경기가 통산 100번째 투어 레벨 경기에 불과했다. 호주오픈을 통해 투어 레벨에서 처음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다. 지난해 우승한 넥스트 제네레이션 ATP 파이널은 투어 레벨이 아니었다.
그만큼 긴장감과 압박이 완전히 다른 경기를 5번이나 치러낸 정현이었다. 사실상 정현에게는 또 다른 첫 경험이었던 셈이다. 수없이 많은 경기를 치르며 물집에 이력이 났겠지만 상대의 실력과 압박이 다른 경기를 연일 쉬지 않고 치른 것은 처음이었다.
정현은 지난 2004년 호주오픈 당시 84위였던 마라트 사핀에 이어 14년만에 4강에 오른 하위 랭커였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얼마나 투어 레벨이 높은 수준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정현의 이번 성적은 대단하면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영국 BBC는 정현의 기권패가 코트에서만 12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4강까지 오르긴 했지만 육체적인 부담감을 없애는 경험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현에게는 다시 못할 경험이 된 그랜드슬램이었다. 정현에게 올해는 쌓여가는 행복 속에서 독을 다스려가는 새로운 레벨의 한 해가 될 전망이다.
한편 페더러는 장내 인터뷰를 통해 "나도 물집을 경험 해봐서 얼마나 힘든지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멈춰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서 "정현은 세계랭킹 10위 안에 충분히 들어갈 실력을 지녔다. 대단한 선수"라고 말해 정현의 경험을 아쉬워하면서도 기량을 인정했다. /letmeout@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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