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은? 놀랍게도 포드의 F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무려 89만 6000대가 팔렸다. 그런데 포드 F시리즈는 픽업트럭이다. 뒷면이 짐을 실을 수 있는 오픈형 데크로 돼 있는 소형 트럭이다. 판매 2위를 기록한 쉐보레 실버라도(58만 5864대), 3위의 닷지 램(50만 723대)도 모두 픽업트럭이다.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에도 픽업트럭이라는 세그먼트가 열리려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영역의 독보적인 모델을 생산, 판매하는 제조사가 굳이 ‘픽업트럭’이라는 말을 피하고 있다. 트럭이라는, 화물차라는 이미지가 먼저 부각 되는 게 부담스러운 게다. 그래서 그들은 오픈형 SUV라는 억지스러운 조어법을 쓰고 있다. 태생은 SUV인데, 열린 형태의 데크를 달았으니 오픈형 SUV로 부르겠다는 심산이다.
쌍용자동차가 지난 9일 출시한 ‘렉스턴 스포츠’가 대박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2일 사전계약을 시작했고, 9일 출시행사를 가졌는데 그 때까지 집계 된 물량이 2,500대 였다. 그런데 쌍용자동차는 미디어 시승행사가 열린 지난 18일, “17일 마감 기준으로 5,500대가 넘었다”고 발표했다. 이 진도는 쌍용차에 희망의 불씨를 지핀 티볼리 때 보다 더 좋다.
그렇다면 렉스턴 스포츠에 쏠린 이 뜨거운 관심이 ‘오픈형 SUV’라고 세그먼트를 정의해서 일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사전예약을 한 5,500명은 렉스턴 스포츠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 지 누구보다 잘 안다. 이 차가 어떤 쓰임새를 갖고 있는 지 또한 아주 잘 안다. 이 정도 초기 반응이라면 ‘오픈형 SUV’라는 어정쩡한 수식어보다는 ‘픽업트럭’이라고 당당하게 커밍아웃을 해도 되지 않을까?
지난 16일부터 사흘간 쌍용자동차는 춘천 소남이섬에서 렉스턴 스포츠 미디어 시승행사를 열었다. 시승행사에 참석한 기자단의 열기도 뜨거웠지만 행사 규모 또한 역대급이었다. 프로그램을 아예 온로드와 오프로드로 나누고, 오전 온로드 시승, 오후 오프로드 체험으로 꾸몄다. 오프로드 체험은 이미 뚫려 있는 산속 길을 달리는 게 아니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소남이섬 일대에 오프로드 체험코스를 인공으로 꾸몄다. 언덕 경사로 코스를 만들기 위해 대형 트럭 100대 분의 흙더미를 쌓을 정도였다. 쌍용차는 이 시설물을 미디어 시승행사 후에는 소비자 대상 시승장으로 계속 활용한다. 쌍용차가 역대급으로 시승 행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렉스턴 스포츠에 쏠린 소비자들의 관심 덕분이었다. 행사장에 상주해 있는 쌍용자동차 관계자들은 한껏 고무 돼 생기가 넘쳤고, 언뜻언뜻 자신감도 보였다.
온로드는 소남이섬을 출발해 서울양양고속도로-구룡령로-설악로를 달리는 왕복 86km의 구간이었다. 쌍용차의 플래그십 대형 SUV인 ‘G4 렉스턴’의 기본 골력을 그대로 갖고 왔고, 똑 같은 파워트레인을 쓰며 실내 설비 또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운전석에 와닿는 감흥은 G4 렉스턴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뒷좌석이 상대적으로 좁고 뒷좌석 이후가 막혀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그렇지만 렉스턴 스포츠와 비슷한 형태의 픽업트럭인 닛산 나바라, 폭스바겐 아마록 등과 비교했을 때는 오히려 레그룸이 더 여유가 있게 설계 됐다.
주행성도 G4 렉스턴과 큰 차이가 없었다. 유로 6를 충족시키는 최대 출력 181마력의 LET 2.2리터 디젤 엔진은 1400rpm부터 최대 토크 40.8kg.m이 발휘되도록 세팅 됐다. 이 최대토크는 2,800rpm까지 유지 되고 그 이후에는 소폭 떨어진다. 이 같은 엔진 세팅의 특성은 주행감에서도 그대로 확인 됐다. 출발에서부터 시속 80km 구간에서는 여느 프리미엄 브랜드 못지 않게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반응을 보였다. 시속 80km에서 110km 구간에서는 박진감은 다소 약해지지만 부드러운 가속에는 문제가 없었다.
시속 110km 이상에서는 LET 2.2 디젤의 특성을 감안한 가속 습관이 필요해 보였다. 이미 1400rpm에서 최대 토크가 발휘 됐기 때문에 액셀을 더 깊이 밟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이 구간에서는 토크보다는 4000rpm에서 분출 되는 최대 출력(181마력)에만 의존해야 했다. 풀 액셀을 이용한 킥다운은 적어도 렉스턴 스포츠에서는 잊어버리는 게 좋을 듯했다. 대신 여유를 갖고 액셀을 조금씩 더 깊이 밟아 나가는 운전 습관을 들인다면 속도 자랑을 하는 고속도로에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을 주행성능을 갖고 있었다. 2200cc의 배기량이 딴 데 가 있을 리는 없다. 서서히 탄력받는 대신, 한번 탄력받고 나면 날렵한 몸놀림이 가능해졌다. 복합연비는 2WD 6단 자동변속기 기준 10.1km/l다.
온로드에서는 장단점이 함께 있었지만, 모두 10개의 구간을 지나게 돼 있는 오프로드 체험에서는 렉스턴 스포츠의 강점밖에 보이지 않았다. 언덕 경사로를 출발해 통나무 구간, 자갈코스, 자갈 슬라럼, 범피코스, 사면경사로, 모글코스 등을 지나게 돼 있는데 오프로드에서 더욱 강해지는 렉스턴 스포츠의 특성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렉스턴 스포츠의 오프로드 대응 능력은 받쳐주는 세부 요인을 열거할 필요가 있겠다. 가장 든든한 기초는 역시 쿼드 프레임이다. 프레임 바디로 차체를 구성하면서도 부위에 따라 다른 특성을 부여한 4중 구조 설계가 쿼드 프레임이다. 예를 들어 정면 충돌시 충격을 흡수해야 하는 전면부 크래시 박스 존은 프레임이 충돌 시 주름이 잡히며 쪼그라들도록, 역할에 따라 다른 특성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차체 강성을 높이기 위해 고장력 강판을 대거 적용한 것도 오프라인 강자를 만든 요인의 하나다. 렉스턴 스포츠는 고장력강 53.8%, 초고장력강 25.4%, 일반강 20.8%를 사용해 고장력 강판 사용 비율이 79.2%나 된다.
오프로드 주행에서 필수적인 사륜구동 시스템은 일반 도로에서는 후륜 2륜으로 달리다가 진흙이나 모래, 눈길에서 효과적인 고속 사륜구동(4H)으로, 최대 견인력을 필요로 하는 구간에서는 저속 사륜구동(4L)으로 변환해 대응할 수 있다.
차동 기어잠금장치(Locking Differential)는 한쪽 바퀴가 헛돌거나 공중에 떠 있는 환경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급격한 경사로를 내려갈 때는 저속 주행장치(HDC, Hill Descent Control)가 필수적이다. 이 장치를 가동 시키면 급경사로에서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저속(5~30km/h)이 유지 된다. 이 장치가 켜진 상태에서는 내리막에서 속도를 높이려면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액셀을 밟아야 한다. 일부 옵션 사양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렉스턴 스포츠에는 이 같은 기능이 모두 탑재 돼 있고, 그 덕에 오프라인에서의 자유를 보장 받았다.
시승에서 확인한 다양한 매력도 매력이지만 결정적으로 렉스턴 스포츠는 어마어마한 가격경쟁력과 최대치의 실용성을 갖고 있다. 2,320만 원부터 3,058원 사이에 형성 된 차량 가격은 대형 SUV로 향하는 진입장벽을 확 낮췄다. 고급스러운 디자인은 ‘G4 렉스턴’에서 입증 됐다. 연간 자동차세는 2만 8,500원에 불과하고 개인사업자는 차량가격의 10%에 해당하는 부가세도 환급 받는다. 1,011ℓ에 이르는 압도적인 데크 용량, 최대 3톤까지 끌 수 있는 강력한 견인능력(towing capacity), 데크에 설치 된 파워아웃렛(12V, 120W) 등은 비교를 불허하는 실용성이다.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합리적인 차량가격, 게다가 다양한 쓰임새까지, 이 차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은 ‘품위 있는 실용성’이 인정받고 있다는 방증일 터다. /100c@osen.co.kr
[사진] 렉스턴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