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다언] '슈퍼매치' 시작-서정원, 데얀-2차 성장
OSEN 우충원 기자
발행 2018.01.07 05: 57

#슈퍼매치의 시작은 '지지대 더비'로 알려져 있다. 수원 삼성과 FC 서울의 전신인 안양 LG시절 열렸던 경기가 시간이 흐른 뒤 '지지대 더비'로 드러났다. 그러나 서울이 연고지 이전을 하면서 수원과 서울의 경기는 '슈퍼매치'가 됐다. 또 세계 7대 더비로 알려졌다. 물론 세계 7대 더비라는 이름은 잘못된 사실. 7번째로 FIFA가 소개했기 때문에 7대 더비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수원에서 코칭 스태프로 함께 힘을 모았던 김호 감독과 조광래 감독의의 맞대결이 시작이었다. 수원의 수석코치였던 조광래 감독은 김호 감독과 결별했다. 그리고 안양 LG 감독이 됐다. 둘은 치열하게 경기를 펼쳤다. '슈퍼매치'의 전조였다. 물론 중간 여러가지 사연이 있었다. '치토X'와 '닭X개'로 서로를 비하 하기도 했고 상대를 자극할만한 세리머니를 펼치기도 했다. 세계 7대 더비는 아니지만 K리그에서 가장 치열한 경기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원래 시작은 서정원 감독 때문이다. 1993년 안양 LG에서 프로에 데뷔한 서 감독은 1997년 컵대회 득점왕에 오르는 등 당시 안양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잘 생긴 외모도 서정원 감독의 인기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위력적인 경기력을 통해 서정원 감독은 프랑스리그에 진출했다. 서 감독은 유럽에서 3팀에서 뛰었는데 가장 먼저 뛴 팀이 스트라스부르였다. 하지만 기회를 받지 못했다. 결국 팀을 떠날 결심을 한다. 그 후 1999년 국내로 갑작스럽게 복귀한다. 당시 서정원 감독은 안양 LG가 아닌 수원 삼성으로 이적한다.

#안양 LG로 복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그러나 수원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본격적으로 더비전이 열릴 기미가 보였다. 법적공방 끝에 수원 삼성에 안착한 서 감독은 더 큰 활약을 펼쳤다. K리그 2회 우승,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2연패 등 활약이 대단했다.
#1999년 3월 안양 LG팬들은 팀으로 복귀하지 않은 서정원의 유니폼을 태웠다. '화형식'이라는 이름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관계자는 "안양팬들의 울분이 대단했다"라고 전했다. 직접 화형식을 진행했던 한 안양 LG팬은 "잊을 수 없다. 그 때 당시에는 정말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눈물의 화형식'이었다.
#슈퍼매치는 치열해졌다. 단순히 순위 싸움이 아니라 자존심이 걸린 경기였다. 수원과 서울의 사령탑은 연고전 혹은 고연전처럼 슈퍼매치를 위해 선수들을 아끼기도 했다. 역대 전적에서는 수원이 92전 35승 26무 31패로 근소하게 앞서있다. 수원 삼성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지만 최근 서울이 많이 추격했다.
#수원과 서울서 슈퍼매치 최다 출전자는 은퇴한 곽희주와 데얀이다. 곽희주는 34경기에 나섰고 데얀은 27경기에 출전했다. 데얀은 슈퍼매치에 대한 강한 승부욕을 나타내기도 했다. 데얀은 슈퍼매치 최다득점자이기도 하다. 승부욕이 강한 데얀의 장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상황이다. 치열한 경기서 골을 넣고 이기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서정원 감독에 이어 데얀이 상대팀으로 이적했다. 선수 본인의 의지에 따라 이적했다. 서울은 데얀과 재계약을 추진하지 않았고 데얀은 안정된 생활이 가능한 곳을 원했다. 중국 베이징 궈안에서 뛰었던 데얀은 가족들을 위해 K리그로 복귀했다. 큰 활약을 펼쳤고 서울은 새로운 선수구성을 원했다. 반면 수원은 공격수가 필요했고 국내 사정을 잘 아는 이싸빅이 데얀을 수원에 입단시켰다. 이미 수원 선수들이 많이 사는 동탄에 집을 구해놓았다. 수원에서 활약만 펼치면 된다.
#그동안 이상호, 백지훈 등의 이적이 있었지만 팀을 대표할 만한 이적은 아니었다. 시작이 서정원 감독이었다면 지루해져 가던 슈퍼매치에 불을 붙인 것은 데얀이다. 슈퍼매치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2차 성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신자 혹은 여러가지 이유가 붙어야 한다. 슈퍼매치 뿐만 아니라 K리그까지 더 이슈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0bird@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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