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빨 유니폼의 색깔이 무뎌졌다. 이제 그 자리는 '동행'이 채우고 있다.
KBO리그 처음이자 가장 강력했던 왕조는 단연 해태다. 1983년 첫 왕좌에 오른 해태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역대 최초 한국시리즈 4연패였다. 이어 1991년과 1993년, 1996년, 1997년 왕좌에 올랐다. 당시 KBO 16년 역사에서 무려 아홉 차례 정상에 오른 것. 20세기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당연했다.
선수층도 쟁쟁했다. '국보급 투수' 선동렬을 필두로 김봉연, 김성한, 한대화, 이순철 등이 타선을 이끌었다. 1990년대에는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임창용에 이종범, 장성호 등이 자리매김했다. 흔들릴 것 같지 않던 왕조였다.
그 해태의 상징은 바로 '검빨 유니폼'이었다. 짙은 붉은색 상의에 시커먼 하의. 해태에 막혀 우승을 놓쳤던 팀들에게 이 검빨 유니폼은 진절머리 날 정도였을 터.
해태는 모기업의 재정난으로 빛을 잃었다. 결국 2001시즌 도중 KIA에 인수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왕조를 물려받은 KIA였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2009년 한 차례 우승을 차지했지만 선배들의 위업에는 한참 못 미쳤다. 뚜렷한 팀 컬러도 없었고, '타이거즈 정신'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김기태 감독이 부임하면서 조금씩 팀 컬러를 구축했다. 김기태 감독은 LG 사령탑 시절부터 '형님야구'를 꽃피웠던 인물이다. 화통한 리더십은 KIA에서 비로소 동행으로 자리매김했다.
김기태 감독은 좀처럼 선수를 비난하는 법이 없다. 부진한 선수에 대해 질문하거나, 구설에 오른 이들을 물을 때면 "그 이야기는 좀…"이라며 말끝을 흐린다. 작전 실패나 본헤드플레이에도 모든 걸 '내 탓이오'라고 돌리는 김 감독이다. 선수와 코칭스태프, 그리고 프런트까지. 철저히 구성원을 위하는 게 김 감독의 리더십이다. 전력이 강하지 못했던 KIA였지만 지난해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았고 올해 왕좌에 올랐다.
선수들은 힘이 날 수밖에 없다. 지난 시즌 막판 경찰 야구단 전역 후 팀에 합류했던 안치홍은 올 시즌 "사실 밖에서 본 감독님은 카리스마로 가득했다. 하지만 선수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하시다"라며 감탄했다.
시즌 내내 KIA의 상징이었던 동행은 비시즌에도 이어진다. 그 첫 걸음은 조계현 전 수석코치의 단장 승진이었다. LG 시절부터 김기태 감독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모신 조 단장은 이제 구단의 얼굴이 됐다. 조 단장은 "김기태 감독님을 도와 동행 정신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방점은 서재응 코치의 영입으로 찍었다. 서 코치는 2015년 은퇴 후 해설위원으로 2년간 현장을 누볐다. 현장에 대한 갈증이 있던 차에 KIA의 제안을 받았다. 서 코치는 OSEN과 통화에서 "아직 지도자로서 특별한 색깔을 내고 싶지는 않다. 초짜 코치일 뿐이다"라면서도 "김기태 감독님의 모토가 동행 아닌가. 그에 따르겠다. 선수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소통하고 싶다"고 밝혔다.
조계현 단장 역시 비슷한 생각이다. 조 단장은 "해태는 KIA의 전신이다. 그 역사를 계승하는 건 맞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조 단장은 "해태를 KIA가 인수한 뒤 벌써 두 번 우승했다. 이제 KIA의 컬러도 구축됐다. 바로 김기태 감독님의 동행 정신이다"라고 설명했다.
억지로 '해태 색깔 지우기'를 택하는 대신 말없는 동행으로 묵묵히 걸었다. 이제 그것이 또 하나의 타이거즈 정신으로 자리매김했다. /ing@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