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 군대에서 전역하기도 전, 사귀던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덜컥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를 온전히 책임지기엔 아직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것 같다. 결혼을 앞둔 어느날, 어쩌면, 아니, 굉장히 확실하게 이 아이의 아빠가 사실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전하지 못한 청첩장만 남겨둔 채 여자친구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고, 엄마를 찾는 아이만 곁에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남자는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영화 '아기와 나'(손태겸 감독)는 바로 이 남자의 선택과 성장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단편 '야간비행'으로 '금기를 건드린 젊은 감독'이라는 호칭과 함께 칸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에서 3등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가 주목하는 손태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하다.
장편 데뷔 소감에 대해 손태겸 감독은 "단편영화 작업과는 정말 많은 것들이 다르더라"고 회상했다. 약 2시간에 달하는 긴 호흡으로 관객을 만나야 하는 장편영화를 처음 작업하면서 '책임감'과 '유대'를 배웠다는 손태겸 감독."
"단편은 장편보다 조금 더 소소한 개인적인 얘기를 다룰 수도 있고, 단편이라는 규격을 가지고 허용할 수 있는 상상력이 있는 마당이 있다고 한다면, 장편은 관객 분들이 긴 시간을 감내해서 보셔야 하고, 작품이 단편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야 하니까 제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정말 많더라고요. 제작적인 부분에서는 정말 안 끝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본 촬영이 23회차로 진행됐고, 이후에 못 찍은 장면이나 아기 배우와 함께 하는 장면을 조금 더 보충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본 촬영은 11월 말에 끝났고, 보충 촬영을 12월부터 진행했는데 촬영 중에 다들 '크리스마스에 보지 말자, 새해엔 보지 말자' 했는데 다 함께 했어요(웃음). 장편은 정말 현장에 출퇴근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몸에 직업적으로 배는 느낌이랄까. 또 감독으로서 스태프 분들과의 유대를 잘 끌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했어요."
특히 손태겸 감독은 최고의 배우를 먼저 알아보는 혜안을 가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생'으로 연기돌을 넘어 배우로 자리잡은 임시완에게서 가장 먼저 장그래를 발견한 사람은 손태겸 감독이었고, '침묵', '용순'으로 충무로의 미래가 된 이수경을 가장 먼저 카메라 앞에 세운 사람 역시 그다. '재목으로 자랄 싹수'를 알아보는 눈은 연출력만큼이나 섬세하다.
"제가 캐스팅 디렉터인 것처럼 프로필을 건네주시고 어떠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일단 전 이수경 배우가 제 단편영화로 연기를 시작했다는 걸 개인적으로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캐스팅을 위해서 어렵게 협조를 받아서 학교에 갔는데, 그때 이수경 씨가 고등학생 때였거든요. 연기반 친구들이 종례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이수경 배우밖에 안보이더라고요. 오디션을 보기 전부터 이미 마음 속에선 이수경 배우가 확고했었죠.
임시완 씨는 제국의 아이들 활동하고 계실 때 TV로 처음 봤어요. 가수로도 정말 훌륭하지만, 배우가 더 잘 맞는 옷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해를 품은 달'에서 연기하는 걸 보고 얼마 안 있다가 '미생' 프리퀄을 하게 되면서 장그래 0순위로 임시완 씨를 생각했어요. 공을 들여야 하는 분이 아닐까, 어려운 마음에 넌지시 제안을 드렸는데 미팅을 짧게 마치고 흔쾌히 승낙을 해주셨죠. 드라마의 캐스팅 전후사정이야 저도 잘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단편을 하고 이후에 '미생'에 나오셨으니까 개인적으로는 기분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손태겸 감독의 혜안은 '아기와 나'를 통해 다시 한 번 빛났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KBS 2TV 드라마 '고백부부'에서 고독재 역할로 전성기를 연 이이경. 코믹 캐릭터로 '인생 캐릭터'를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손태겸 감독이 주목한 것은 이이경의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이이경에게서 혼란한 시절, 방황하는 청춘 도일의 얼굴을 끄집어 낸 손태겸 감독의 눈은 이번에도 정확했다. 아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막막하기만 한 청년 도일이 된 이이경은 날 것 그대로의 연기를 통해 가장 생경하고, 가장 매력적인 얼굴로 관객을 매료시킨다.
손 감독은 이이경의 캐스팅에 대해 "이이경 배우가 출연한 이송희일 감독님의 '백야' 시사회장에서 만나게 다. 아는 배우 분의 초대로 가게 됐는데, 이이경 씨의 얼굴에서 처절한 이야기가 보이더라"며 "만약 제가 처절한 얘기가 있으면 한 번 쯤 꼭 작업해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이이경 씨는 예능도 많이 하고 발랄한 모습도 많이 보여줬는데, 제가 보기엔 배우로서 더 진지하고 처절하면서도 슬픔이 있는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능력과 연기력과 마스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며 "저 역시 이이경 씨의 전혀 다른 면을 끄집어 내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배우 본인도 다른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원하는 것들이 맞아떨어졌다"고 말했다.
손태겸 감독이 좋은 사람, 좋은 배우를 알아볼 수 있는 비법은 과연 무엇일까. 갑자기 머릿 속을 스친 질문에 전혀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영화 연출을 위해 할 수밖에 없었던 아르바이트. 생활을 지탱해주는 손 감독의 또다른 '부업'은 의외의 영역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제가 지금 아르바이트를 7년째 하고 있어요. 모 브랜드에서 판매일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아르바이트 할 곳 없으면 해보라고 하셔서 시작하게 됐죠. 그런데 프리랜서처럼 일할 수 있도록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해주셨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최대 1년까지 쉬어봤죠. '야간비행' 때는 평일에 일하고, 주말에 촬영하고, 그렇게 번 돈을 다 들였어요(웃음). 저희 매장 창고에서 협조도 받았죠. '미생' 프리퀄 때도 4개월을 쉬었고요. 독립영화를 하는 사람은 투잡, 쓰리잡을 하게 돼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정말 신기한 게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사람을 보는 눈이 길러지더라고요. 판매라는 게 2~3분의 만남이지만, 다양한 분들을 만나는 재미도 있어요. 어떤 분은 먹고 사는 문제와 관계없이 좋은 경험인 것 같다는 말씀도 해주시더라고요. 감정노동 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글쓰고 영화 보고, 자기계발을 오롯이 할 수 있으면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생계랑 영화는 계속 같이 걱정해야 할 것 같아요. 노동 이즈 베리 임포턴트(웃음), 노동은 신성한 거예요. 이틀 전에도 근무하고 왔다니까요."
(Oh!커피 한 잔②에서 이어집니다.)/mari@osen.co.kr
[사진] KAFA/CGV아트하우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