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가 한창 재밌을 때잖아".
올 시즌을 앞두고 두산의 '뎁스 차트'를 떠올린다면 주전 유격수는 단연 김재호였다. 실제로 김재호는 91경기에 출장해 688이닝을 소화하며 이 부문 팀내 1위에 올라있다.
김재호는 지난해 137경기에서 1072이닝을 소화했다. 정규시즌이 끝나가는 지금, 올해는 전년 대비 출장 경기수와 이닝이 확 줄었다. 이유는 부상. 김재호는 6월부터 경기에 나서기 힘들 만큼의 허리 통증을 느꼈다. 책임감이 강한 김재호는 어떻게든 버텼지만 결국 7월말 백기를 들고 주장을 맡은 뒤 처음으로 1군 말소됐다.
김재호는 보름이 지난 뒤 1군에 돌아왔다. 그리고 13경기에서 타율 4할4푼1리, 3홈런, 15타점으로 펄펄 날았다. 그런 그에게 두 번째 부상이 찾아왔다. 김재호는 지난달 30일 잠실 롯데전서 파울 타구 처리 도중 좌익수 김재환과 충돌을 피하다 넘어졌다. 왼 어깨 주위 관절 인대 손상. 김재호는 5일 일본으로 건너가 수술과 재활 여부를 두고 재검진을 받았다.
결국 재활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김재호는 11일(월요일) 일본으로 다시 넘어가 전기 치료 등 재활 과정을 거칠 계획이다. 치료 기간만 2주. 사실상 정규 시즌 복귀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김재호의 낙마는 분명 큰 걱정거리이지만, 두산에게도 믿는 구석은 있다. 바로 류지혁의 존재다.
류지혁은 지난해 90경기에서 타율 2할8푼8리(118타수 34안타), 3홈런, 9타점으로 눈도장을 찍었다. 많지 않은 타수에서 드러나듯 역할은 어디까지나 백업이었다. 류지혁은 지난해 유격수로 155이닝을 소화하는 데 그쳤다.
올 시즌은 완전히 달라졌다. 류지혁은 111경기에서 타율 2할8푼1리(253타수 71안타), 3홈런, 25타점을 기록 중이다.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의 타석에 들어섰다. 유격수 수비이닝도 마찬가지. 류지혁은 8일 경기까지 437이닝을 도맡았다. 실책은 10개를 기록했지만 넓은 수비범위를 감안하면 실보다 득이 많았다.
사령탑은 류지혁의 활약에 대만족을 표했다. 8일 잠실 kt전에 앞서 취재진과 만난 김태형 두산 감독은 류지혁 칭찬에 여념없었다. 김 감독은 "(김)재호가 빠진 상황에서 (허)경민이를 유격수로 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큰 변수가 없는 이상 잔여 시즌 유격수는 류지혁이다"라고 선을 그었다.
김 감독이 지켜본 류지혁은 '강단'있는 선수였다. 김태형 감독은 "강단있는 성격은 결코 노력으로 만들 수 없다. 어느 정도는 타고나야 하는데, 지혁이가 딱 그렇다"라고 운을 뗐다. 이어 김 감독은 야구 선수를 크게 두 분류로 나눴다. '커리어가 쌓이면서 조금씩 만개하는 유형'과 '타고난 기질이 돋보이는 유형'. 전자가 대기만성이라면 후자는 천재형쯤이다. 김 감독이 보는 류지혁은 정확히 후자다.
김태형 감독은 "지금은 야구가 한창 재밌게 느껴질 때다. 백업으로 분류됐던 선수였지만 출장 경기 수가 확 늘었다. 지치기도 하겠지만 본인도 지치는 줄 모를 것이다"라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경험이 더해진다면 더 큰 선수로 성장할 것이라는 김 감독의 예상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멀티 포지션 역시 류지혁의 강점. 류지혁은 올 시즌 3루수로도 104이닝에 나섰다. 김태형 감독은 류지혁의 3루수비도 극찬했다. 김 감독은 "스프링캠프 때 여러 포지션을 다 시켰다. 본인이 자신감 있게 덤벼들었다. 그게 본인 값어치를 올리는 길이면서 또 팀에 보탬이 되는 것이다"라며 "물론 3루 수비는 경민이에 비해 부족하다. 그러나 타 구단 백업 내야수 누구와 갖다대도 수비력에서 밀리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다.
주축 선수가 부상으로 낙마했지만 이만큼 강한 잇몸이 그 자리를 메우는 것. 지난 십수년 두산이 보여준 화수분 야구의 한 줄 요약이다. 아무래도 두산 화수분이 또 한 명의 유망주를 만들어낸 듯하다. /ing@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