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의 SK랩북] 이성우, 서른일곱에 시작된 ‘보너스 게임’
OSEN 김태우 기자
발행 2017.09.01 11: 19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이름은 없었다. 대신 후배들의 이름만 올라가 있었다. 나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올해가 마지막이겠구나”라는 잡념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베테랑 포수 이성우(36)는 올해 KIA의 오키나와 전지훈련 명단에서 제외됐다. 이는 1군에서 즉시 활용할 전력이 아님을 시사했다. 어느덧 30대 중반에 이른 선수에게는 사실상의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불길한 예감은 꼭 실현된다고 했던가. 시즌이 시작할 때도 KIA 포수진에서 이성우의 자리는 없었다. 스스로도 반은 체념이었다. “오빠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야구 아닌가. 끝까지 해보라”는 아내의 격려에 마음을 다잡곤 했지만 냉정한 현실에 어깨가 처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많이 내려놨다고 떠올리는 이성우다. 후배들에게 조언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너희들이 잘 하지 못하면 마지막에는 나에게 기회가 온다. 나에게 기회를 주지 말고 너희들이 그 기회를 꼭 잡으라”고 파이팅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가슴 한켠에 불만이 고개를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인 이상 당연했다. 그렇게 갈팡질팡하며 은퇴를 생각하고 있을 무렵, 하나의 전기가 찾아왔다. 바로 4월 초 단행된 SK와 KIA의 4대4 트레이드였다. 새 소속팀이 생긴 것이다.

“이성우 없었으면…” 가치 증명한 트레이드
당시 트레이드는 이명기 김민식(이상 KIA), 노수광 이홍구(이상 SK)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이성우를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전략적 가치가 크다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었다. SK는 당시 두 포수(이재원 김민식)를 제외하면 1군 경험이 있는 포수가 단 하나도 없었다. 둘 중 하나라도 부상을 당하면 비상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판에 끼어 넣은 선수가 바로 이성우였다는 게 염경엽 SK 단장의 설명이다.
SK의 선택은 적중했다. 이재원이 무릎 수술 여파로 제대로 된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한 가운데 이홍구 또한 경기 중 손가락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1군에서 평생 못 뛸 줄 알았다”던 이성우는 그렇게 6월 15일 1군 무대를 밟는다. 그리고 차츰차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시작한다. 이재원의 뒤를 받치는 ‘세이브 포수’에서 시작, 안정적인 투수 리드로 어느덧 주전급 포수에 버금가는 출전 시간을 가진 핵심 자원으로 거듭났다.
이성우의 가장 큰 가치는 수비다. “수비 하나만 놓고 보면 SK 포수 중 가장 안정감이 있다”는 게 전반적인 평가다. 박경완 배터리코치 또한 “이재원이 주전으로 할 몫이 있다면, 이성우는 경기 후반에 가치가 있다. 두 조합이 잘 어울린다”고 설명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투수들을 이끄는 리더십도 일품이다. 경험이 풍부한 포수라 순간적인 임기응변도 좋다. SK에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었기에 더 빛이 난다.
갈수록 타격도 나아지고 있다. 이성우는 “코칭스태프도 내 타격은 큰 기대가 없다. 치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수비에 집중하려 한다”고 했지만 후반기 31경기 타율 2할6푼8리, 8월 22경기 타율은 3할4리로 나름 쏠쏠한 활약을 펼치고 있다. 얕보다간 의외의 일격을 얻어맞는 구조다. 이처럼 공·수 모두에서 기대 이상인 이성우의 가치는 4대4 트레이드의 새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성우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는 구단 관계자들의 안도는 이를 증명한다.
주전 포수? 뛰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성우는 자신의 활약이 고평가되고 있는 것 같다며 겸손해 하면서 “정말 원 없이 뛰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좋다. 가끔은 ‘20대 때 이렇게 기회가 왔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 만족한다. 더 이상 욕심은 없다. 욕심을 부릴 위치도 아니다”고 미소 지었다. 이성우는 그런 겸손이 몸에 쌓인 선수다. 만 36세의 베테랑이지만, 올 시즌 전까지 305경기 출전이 전부인 후보 선수로서 자연히 생긴 미덕일지도 모른다.
사실 출전 빈도로만 보면 이재원보다 더 많을 수도 있는 이성우다. 이성우의 활약에 이재원도 자극을 받는 것 같다는 게 코칭스태프의 이야기. 그렇다면 뒤늦은 나이에 잡은 기회가 욕심, 이를 테면 주전 포수에 대한 야망을 부르고 있지는 않을까. 이성우는 이에 대해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젓는다. 오히려 “그냥 죽으란 법은 없다는 것을 느끼기는 했지만, 나는 2~3년은커녕 내년도 장담할 수 없는 위치”라고 더 자세를 낮춘다. 후배들에 대한 미안함도 숨기지 않는다.
이성우는 “SK라는 팀은 이재원이 중심을 잡고 가야 살 수 있는 팀이다. 비록 재원이가 올해 부진하기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오는 법이다. 박경완 코치님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분명 내년에는 잘할 것이다. 확신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사실 (이)홍구가 돌아올 때까지만 1군에 있을 줄 알았는데 후배의 자리를 뺏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있기도 하다”고 털어놨다.
오히려 자신의 지금을 ‘보너스 게임’이라고 말하는 이성우다. 아무 것도 못하고 은퇴해 잊힐 줄 알았다. 야구인생의 본 게임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런데 그 끝에 뜬금없는 보너스 게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놀랐지만, 어차피 그 끝이 본 게임의 성적을 뒤집어 놓을 만큼 화려하지 못할 것을 안다. 그래서 욕심 없이 그 자체를 즐기려고 한다. 그저 경기에 나가는 것이 행복하다고 강조한다.
이 보너스 게임이 언제까지 진행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본 게임보다는 짧을 것이라는 점이다. 잘못하면 내년에 바로 끝날 수도 있다. 다만 어차피 한 번 끝을 경험한 이성우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가는 곳까지 순리대로 가보자는 생각이다. 단지 하나의 작은 바람이 있다면, ‘화려하거나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팀에는 필요했던 선수’로 기억되는 것이다. 서른일곱에 시작된 보너스 게임의 마지막 미션이다. /SK 담당기자 skullbo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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