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데이] 라흐마니노프의 한탄 비애 그리고 애도 ‘Preghiera’(DG)
OSEN 김관명 기자
발행 2017.08.23 12: 23

평소 이어폰이나 소형 블루투스 스피커로 듣던 클래식 음반을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으로 들으면 어떨까. [클럽데이]는 음악적으로만 클래식 음반을 접근하던 기존 리뷰와 달리, 음반에 담긴 음향학적 의미와 감동까지 음미해보고자 기획됐다. ‘클래식 러브 데이’, 그래서 [클럽데이]다. 클래식 음반은 CD, LP 혹은 CD를 리핑한 음원에 한정했다. 오디오 시스템은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한 광대역 스피커에 적정 볼륨을 마음껏 확보할 수 있는 독립 시청실만큼은 필수조건으로 삼았다.
[클럽데이] 첫회는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지난 2월에 나온 ‘Preghiera, Rachmaninov: Piano Trios’ CD를 골랐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삼중주 2곡과,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편곡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바이올린 합주곡 ‘Preghiera’(기도)가 담긴 음반이다. 연주자는 바이올린에 기돈 크레머(Gidon Kremer), 피아노에 다닐 트리포노프(Danill Trifonov), 첼로에 기에드레 드르바나우스카이테(Giedre Dirvanauskaite) 3인이다. 이 앨범은 기돈 크레머의 70세 생일을 기념해 기획됐고, 연주자도 크레머가 직접 골랐다.
지명도에서는 물론 기돈 크레머가 가장 앞서지만 앨범 전체의 음악적 헤게모니는 올해 26세의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가 쥐고 있다. 2011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 ‘리스트의 후계자’라는 평가를 받는 주인공이다.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이는 사운드적으로도 확연했다. 앨범은 지난해 5월1~3일 룩셈부르크 에히터나흐의 트리폴리온 컬처센터에서 녹음됐는데, 사진을 보니 넓직한 계단식 공간에 바닥과 벽면이 모두 나무로 돼 잔향과 홀톤이 꽤 괜찮을 것으로 기대된다. 무엇보다 악기의 울림이 오래 지속될 그런 환경이다. 프로듀서는 헬무트 뮐러(Helmut Muhler), 녹음 엔지니어는 빌리우스 케라스(Vilius Keras), 알렉산드라 케리네(Aleksandra Keriene).  

본격 리뷰에 앞서 이번 ‘Preghiera’ 앨범을 플레이한 오디오는 이랬다. 소스기기는 마란츠 SACD 플레이어 ‘UD9004’, 인티앰프는 8옴에서 200W 출력을 내는 다질의 솔리드 스테이트 ‘CTH 855’, 스피커는 윌슨베네시의 스탠드마운트 ‘Endeavour’. 여기에 윌슨베네시의 서브우퍼 ‘Torus’를 액티브로 물렸다. 별도 앰프를 통해 200W를 추가로 확보한 것이다. ’Endeavour’는 감도 89dB, 공칭 임피던스 6옴에 38Hz~30kHz(-2dB)라는 주파수응답특성을 가진 2.5웨이 4유닛 스피커. 인클로저에 카본을 아낌없이 두르고, 저역을 담당하는 우퍼 2개가 하단에 서로 마주보고 설치된 ‘아이소배릭’(Isobaric) 구성인 점이 이채롭다.
앨범 타이틀이기도 한 ‘Preghiera’는 5분29초짜리 전채요리.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던 크라이슬러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 2악장을 편곡해 만든 곡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만 참여한다. 메인 코스는 역시 49분33초짜리 피아노 삼중주 2번(Trio elegiaque No.2 in D minor Op.9). 존경하던 선배 작곡가 차이코프스키가 1893년 11월에 죽자 라흐마니노프가 그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1개월만에 완성, 1894년 1월 초연된 곡이다. 제목에 ‘애가’ ‘비가’를 뜻하는 ‘elegiaque’가 붙은 이유다.
1악장 시작부터 비탄조다. 첼로와 바이올린의 애절한 선율에 피아노가 안그래도 침울한 마음을 더욱 후벼판다. 속절없이 내닫는 빠른 템포에 가슴이 더 아리다. 이 곡은 첼로의 저역 사운드와 피아노의 때로는 여리고 때로는 강렬한 다이내믹 레인지를 오디오 시스템이 제대로 구현해주는 게 관건이다. 실제로 이 앨범의 다이내믹 레인지는 말러 교향곡 제2번과 엇비슷한 ’21’을 보인다.
또한 바이올린은 왼쪽 위에, 첼로는 중간 아래쪽에, 피아노는 두 현악기 뒤에 자리잡은 모습이 확연하다. 오디오 애호가들이 흔히 말하는 ‘이미징’과 ‘사운드스테이징’이라는 것이다. 마치 트리폴리온 녹음 현장에 그냥 와 있는 것 같다. 7분30초 무렵에서 비로소 주제선율이 반복되며 부각된다. 11분25초 무렵, 피아노의 격정과도 같은 마성이 살짝 드러나면서, 그랜드 피아노의 통울림이 아주 오래 머물며 곡의 비애를 더한다.
13분15초 무렵부터 15분5초 무렵까지는 바이올린과 첼로가 서로 소근거리며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고 통감하며 좌절하며 스러지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오디오 시스템의 정숙도가 받쳐주지 않으면 이 ‘맛’을 만끽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이어지는 첼로의 독주는 죽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체념으로 읽힌다. 사운드적으로는 첼로 현과 활의 굵은 마찰음, 그리고 브릿지를 통한 통울림이 그윽하게 퍼져나가는 대목이 대단하다. 바이올린과 첼로의 음색은 대역과 배음으로도 구분이 가능하지만, 이 곡에서는 서로의 높낮이 차이로도 가능하다. 17분10초 무렵, 피아노가 주제선율을 대놓고 다시 한번 반복한다. “세상사 다 그런 것”이라는 어른의 다독임 같다.  
2악장은 현의 피치카토와 트레몰로가 섞이기는 하지만 거의 피아노의 독주무대다. 초반에는 좀더 템포가 긴 가운데 유려한 선율로, 중반 또다른 변주 대목에서는 경쾌한 타건에 속주 리듬으로 표변하는 등 피아노가 곡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바이올린은 좀더 가녀려졌고, 첼로는 좀더 물먹은 종이마냥 가라앉았다. 이들 세 악기가 빚어내는 공간감이 기막히다. 어디 하나 헤집고 들어갈 틈이 안보일 정도로 음들이 시청실을 꽉 채웠다. 특히 바닥을 긁어대는 듯한 피아노의 초저역 타건음의 기세가 압권. 이러한 ‘음의 압력’이야말로 요즘 이어폰이나 헤드폰으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선물이다. 17분50초 무렵부터 펼쳐진 세 악기의 향연은 그윽하되 처연했다. “고인을 이제 떠나보내자”고 서로가 마침내 마음을 먹은 것 같다.
‘Allegro risoluto’. 빠르고 결연하게. 3악장은 작곡가의 의도대로 피아노가 빠르고 결연하게 음들을 토해낸다. 피아노 현과 통울림이 녹음공간을 헤집고 부딪히는 모습이 선연하다. 단언컨대 배음과 잔향이 정말 잘된 녹음이다. ‘어린’ 바이올린과 첼로를 다독이며 고인을 보내는 마지막 의식을 솔선하는 ‘어른’ 피아노가 듬직하다. 라흐마니노프가 주문한 ‘빠르고 결연하게’는 아마 이런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저역 건반과 현들이 혹여 깨지거나 끊어질까 염려될 정도로 타건의 힘 또한 장난이 아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현악들은 계속해서 애절한 선율을 한숨처럼 토해낸다. 그리고는 서서히 암전.
맞다. 차이코프스키를 졸지에 저 세상으로 보낸 라흐마니노프의 한탄과 비애, 탄식 그리고 애도와 추념이 바로 이 곡 ‘피아노 삼중주 2번’에 모두 들었다. 그리고 다닐 트리포노프, 기에드레 디르바나우스카이테, 기돈 크레머는 이 49분33초짜리 2016년 녹음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좀체 듣기 힘든 ‘기도’와 좀체 연주되지 않는 ‘피아노 삼중주 1번’은 어쩌면 덤. 언제나 지근거리에 두고 꺼내 들으며 마음의 안식을 찾을 만한 그런 앨범이다.   
[Preghiera]
1. Preghiera
2~4. Trio elegiaque No.2, for piano & strings in D minor, Op.9
- Moderato - Allegro vivace
- Quasi Variazione
- Allegro risoluto - Moderato
5. Trio elegiaque No.1 in G minor Lento lugubre - Plu vi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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