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은 박정배, 최고 불펜 타이틀 채웠다
OSEN 김태우 기자
발행 2017.08.22 10: 00

30대 중반의 불펜 요원은 사실 미래가 걱정될 수밖에 없는 시기다. 싱싱한 어깨를 가진 젊은 선수들은 치고 올라오는데, 구위는 전성기만 못한 경우가 많다. 당해 성적은 내년의 ‘생존’과 연결되기 일쑤다. 욕심이 나고 조바심도 든다.
그러나 박정배(35·SK)는 “많이 내려놓고 시작했다”고 올 시즌 시작을 회상한다. 어쩌면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리고 남들보다 시련을 더 많은 겪은 베테랑이기에 가능했던 이야기일 수도 있다.
SK 불펜의 핵심이었던 박정배는 최근 3년간(2014~2016) 모두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중간에 수술을 받기도 했었고, 시즌을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오르막과 내리막의 교차도 비교적 뚜렷했다. 때문에 올 시즌을 앞두고 박정배에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다. 2군에 갈 위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1군에서 핵심적인 임무를 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작업은, 그래서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비우고 시작한 시즌이 이제 가시적인 성과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박정배는 올 시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SK 불펜의 최고 믿을맨이다. 리그 전체를 둘러봐도 박정배만한 활약을 펼친 셋업맨은 거의 없다. 우완을 놓고 따지면 김진성(NC) 정도가 비교대상이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마지막 순간 최고 자리에도 오를 수 있다.
실제 21일까지 올 시즌 50이닝 이상을 던진 불펜 투수는 리그 전체에서 17명뿐이다. 이 중 마무리 투수를 제외하면 박정배의 평균자책점(3.09)은 김진성(2.99)에 이어 리그 2위다. 피안타율, 피출루율, 피장타율 등 다른 지표를 봐도 1~2위를 달리고 있다. 이닝당 투구수는 14개에 불과하다. 그 어떤 리그의 불펜투수도 박정배만큼 효율적으로 이닝을 정리하지 못했다.
가장 빛나는 것은 주자가 있을 때의 강인함이다. 박정배는 올 시즌 등판 때 총 36명의 기출루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 중 단 7명에게만 홈을 허용했다. 19.4%다. 기출루자 30명을 기준으로 했을 때 단연 리그 최고 기록이다. 18일 인천 LG전에서는 8회 무사 1,2루 상황에서 선발 메릴 켈리를 구원, 정성훈 채은성 강승호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며 팀의 리드를 지켰다. 박정배의 올 시즌을 상징하는 투구 내용으로 손색이 없었다.
박정배는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는 일단 카운트 싸움을 잘해야 하는데 그런 측면이 잘 됐던 것 같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7~8회 등판은 부담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올해는 많은 것을 내려놓고 들어왔다. 시즌 초반에 좋았던 것은 아닌데, 그래도 꾸역꾸역 버텼던 것이 다행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박정배는 “나는 투구의 사이클을 믿는다. 2~3주 정도 좋지 않았으면, 또 2~3주는 좋을 것이라 믿는다”고 덧붙였다.
선수의 말과는 다르게 2~3주나 좋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1~2경기 부진하다가도 다시 안정을 찾곤 했다. 안 좋은 기억을 빨리 잊는 것도 능력이다. 박정배는 이에 대해 “올 시즌 3연투가 한 번도 없다. 투구수도 정해져 있다. 무슨 상황이 생기면 코칭스태프에서 ‘지금 상태에서 100%로 던질 수 있겠느냐’고 항상 물어본다. 코칭스태프에서 많이 배려를 해주신 덕”이라고 다시 겸손하게 말한다.
사실 힘든 시기다. SK는 고정된 마무리가 없다. 어느 정도 보직은 있지만 정형화는 아니다. 때문에 다른 팀에 비하면 등판 시점이 유동적이다. “언제쯤 투입돼, 어느 상황에서 어느 타자를 상대하겠구나”라고 미리 그림을 그리고 들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더 힘들다. 박정배도 인정한다. “지금은 5회부터 생각해야 하니 심리적으로 쉽지 않은 부분은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팀의 5강 진출을 위해 불펜 투수들 전체가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박정배는 “이제는 각자 힘을 모두 쏟아 부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도 예전에는 ‘내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혼자 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같이 해야 한다”고 후배들을 다독이면서 “지금 필승조는 물론 문광은이나 정영일과 같이 해줘야 할 선수들이 부담을 덜고 더 해주면 우리 불펜도 조금씩 바뀌어갈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최후의 보루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든든함이다. /skullbo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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