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의 SK랩북] ‘2년 결실’ 정경배와 SK의 플라이볼 혁명
OSEN 김태우 기자
발행 2017.07.19 10: 00

SK 내야수 나주환(33)은 프로 경력에서 홈런이라는 단어와는 다소간 거리가 있는 선수였다. 지난해까지 프로통산 1088경기에 뛰며 친 홈런은 49개에 불과했다. 한 시즌 최다 홈런은 2009년 118경기에서 기록한 15개였다.
그랬던 나주환이 올해 경력 최고의 홈런쇼를 선보이고 있다. 나주환은 18일까지 시즌 79경기에서 무려 14개의 대포를 뿜어냈다. 역사적 홈런공장이 될 준비를 마친 SK 팀 내에서도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이다. 그렇다면 나주환은 어떻게 홈런 숫자를 불릴 수 있었을까. 비결은 발상의 전환에 따른 타격폼 변화에 있다. 그 한 번의 변화가 자신도 놀랄 만한 결과를 불렀다.
그런 나주환의 변화는 SK의 홈런공장을 상징하고 또 관통한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메이저리그(MLB)에서도 최근 유행인 ‘플라이볼 혁명’의 KBO 판이다. 3년 전에 비해 급격히 늘어난 SK의 팀 홈런은 단순히 ‘체격과 힘’이 좋은 몇몇 선수들의 등장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른바 홈런을 치기 적합한 발사각을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연구와 체계적 훈련이 이제 서서히 결실을 맺는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루아침에 된 일도 아니다. SK판 플라이볼 혁명은 2년 전부터 그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SK의 정체성 변화, 현장이 움직이다
나주환은 원래 특정한 폼에 고정되어 있는 선수는 아니다. 스스로 끊임없이 더 좋은 폼을 찾아 연구한다. 그런 나주환이 현재의 ‘홈런 폼’을 찾은 것은 지난해 말이었다. 정경배 SK 타격코치는 “타격시 나주환의 왼팔을 주목해서 보라”고 말한다. 실제 나주환은 2015년에 비해 왼팔이 옆구리에 붙는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왼팔이 아닌, 오른손이다. 신체구조상 자연히 예전보다 오른손이 먼저 방망이에서 떨어진다.
정 코치는 “나주환 타격의 문제는 오른손이 끝까지 따라와 덮다보니 땅볼이 많았다는 것”이라고 떠올렸다. 흔히 말하는 다운스윙이었다. 이는 나주환과 같이 파워히터가 아닌 선수들에게는 나름 효과가 있었다. 힘이 떨어지기에 굴려야 이득인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코치의 생각은 달랐고, 나주환은 의기투합했다. 연습 때부터 아예 땅볼을 치지 못하도록 했다. ‘공 띄우기’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나주환은 “죽더라도 플라이를 쳐서 죽는다는 생각으로 연습을 했다. 코치님께서 폼을 계속 봐주셨다. 코치님께서 나를 오래 보셨으니 폼이 달라지면 즉각 수정을 해주셨다”라면서 “작년 말부터 이 타격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조금씩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바뀌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고 설명했다. 올해 성적에 가렸지만, 기록은 나주환의 장타력이 지난해 말부터 좋아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정 코치는 “맞는 각이 좋아졌음은 물론, 공이 오래 맞을 수 있는 면을 확보하고 있다”면서 “왼팔이 옆구리에 붙으면 오른손이 일찍 떨어지면서 자연히 왼손을 더 사용하게 되어 있다. 왼손이 어떻게 넘어가느냐가 관건인데 나주환의 경우는 발사각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주환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이미 SK의 거포들은 방식만 조금 다를 뿐, 나주환과 같은 발사각 조정 훈련을 거치고 있다. 2년도 더 된 일이다.
2014년 SK 구단 내부에서는 하나의 패러다임 전환을 결정한다. 그간 SK는 왕조 시절을 거치며 투수 중심적 운영을 했다. 이른바 ‘벌떼 야구’였다. 또한 스몰볼이었다. 그러나 왕조가 끝난 후 내부에서는 “규격이 작은 인천SK행복드림구장을 쓰는 상황에서 장타력을 극대화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거세졌다. 방향을 결정한 SK는 이를 저돌적으로 추진했다. 구단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봤다.
프런트는 정의윤을 트레이드로 데려왔다. 이어 최승준을 정상호의 보상선수로 지명했다. 현장에서는 지명을 놓고 다양한 목소리가 나왔지만 프런트가 밀어붙였다. 내부에서는 거포가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진 선수가 누가 있는지 옥석을 추렸다. 군 문제가 남은 선수들은 빨리 보냈다. 현장도 ‘홈런 군단’ 만들기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그 일환이 발사각 조절이었다. 같은 힘을 가지고도 홈런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향이었다.
정 코치는 “얼마 전에 시작한 것이 아니다. 2년 전에 김무관 타격코치님(현 SK 퓨처스팀 감독)이 계실 때부터 시작했다. 김 코치님과 내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떠올리면서 “타격은 다운스윙, 다운업스윙, 어퍼스윙 등 여러 가지 이론이 트렌드처럼 바뀐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현역 생활을 하던 때보다 땅볼을 유도하는 공이 늘었다. 내야 시프트도 많다. 다운 스윙은 죽을 확률이 높아졌다”고 했다. 살 길은 공을 띄우는 것이었다.
훈련 방법 변화, 서서히 몸에 맞는다
타구의 비거리는 발사각과 속도의 조합이다. 제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땅을 향하면 비거리가 꽝이다. 반대로 발사각이 좋아도 속도가 느리면 그냥 플라이다. 일단 토대는 있었다. SK는 일단 타구속도에 필요한 요소 중 하나인 ‘힘’을 갖춘 타자들이 많았다. 선천적으로 타고 난 타자들이었다. 그럼 다음 문제는 이 타자들의 발사각을 어떻게 고치느냐였다.
정 코치는 “지안카를로 스탠튼(마이애미)이나 놀란 아레나도(콜로라도)에서 볼 수 있듯이, 맞는 순간의 임팩트는 공이 배트에 맞는 면을 끌고 나가는 시간이 길수록 타구 속도와 각도가 좋아지기 마련이다. 스윙 스피드가 좋다고 타구가 다 좋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결국 방망이가 공을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이론적 설명을 덧붙였다. 김무관 코치와 정 코치의 결론은 “선천적으로 타고 난 선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교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배팅볼 머신의 발사각부터 바꿨다. 보통 배팅볼 머신은 선수들이 치기 좋게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그러나 훈련용 기계는 아예 땅볼에 가까운 공을 던지게끔 조정했다. 이것을 치려고 하면 어퍼스윙에 가까워질 것 같지만, 여기에 SK 타격파트는 하나의 미션을 더 줬다. 바로 우타자 기준 왼손만 가지고 치게 했다. 이러면 전형적인 어퍼스윙도 안 된다. 자연스럽게 방망이 궤적이 올라가게끔 하는 훈련이었다.
정 코치는 “이런 훈련 외에도 골프공을 올려놓고 (우타자 기준) 왼손만 활용해 골프를 하는 듯 한 느낌으로 치는 훈련도 했다. 골프를 즐기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스윙 궤적이 너무 올라가도 비거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 외에도 다른 방법을 많이 썼다”고 했다. 정 코치 개인적으로도 외국의 타격 이론을 죄다 변역해 흡수할 부분을 체크했다. MLB의 플라이볼 혁명은 이미 아마추어부터 활성화되고 있는 방향이다. 훈련 사례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이를 SK의 사정에 맞게 다듬어 적용시켰다.
이런 방향에서 큰 효과를 본 선수가 바로 지난해 리그 홈런왕 최정이다. 정 코치는 “최정의 경우는 왼손을 자연스럽게 놓으면서 각을 만든다. 자연스러운 팔로스로우까지 갖춰 비거리가 멀리 나간다. 맞는 순간부터 손을 놓고 각을 만드는 과정까지 종합하면 최정이 가장 이상적인 동시에 뛰어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최정 또한 “예전에는 맞을 때의 임팩트를 생각했다면, 지금은 맞는 면을 최대한 넓게 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이는 MLB의 최신 트렌드와도 비교적 일치한다.
2년 뒤에는 더 무시무시해진다?
그렇게 역사적 홈런군단이 될 준비를 마친 SK다. 그러나 정 코치는 “최정 정도만 완성형일 뿐, 아직 멀었다”고 손사래를 친다. 모든 선수에게 이런 훈련을 시키는 것도 아니다. 김강민과 박정권과 같이 자기 타격이 확실한 선수들을 괜히 건드리면 역효과가 난다. 이재원과 같이 원래 스윙 매커니즘이 좋은 선수들은 그대로 놔두는 게 낫다. 굳이 홈런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는 유형의 타자들은 저마다 다른 훈련법이 있다. 하지만 이 SK판 플라이볼 혁명에 동참할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도 많다는 것이 정 코치의 자신감이다.
대표적인 선수가 김동엽이다. 힘은 장사다. 라인드라이브로 비거리 120m 이상을 만들 수 있는 리그의 몇 안 되는 타자다. 다만 일부 코스에서 발사각이 좋지 않다. 여전히 타구의 편차가 심한 이유다. 정 코치는 “김동엽은 아직 멀었다. 다만 낮은 쪽 공을 띄울 수 있는 능력만 보유하면 홈런 50개는 그냥 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김동엽도 “아직 몇 년은 더 해야 할 것 같지만, 지금까지도 확실히 효과는 있는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낮은 쪽 코스의 컨택에 강한 한동민의 경우도 발사각을 더 높여야 한다는 것이 정 코치의 생각이다. 정 코치는 “동민이는 아직도 오른손이 따라온다. 한동민이 풀스윙이나 헛스윙 후 폼이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몸이 못 이길 정도의 빠른 배트스피드를 가지고 있어서다. 배트스피드 하나만 놓고 보면 우리 팀 최고다. 그런데 발사각이 낮아 2루쪽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많다. 조금만 더 띄우면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허리 통증 탓에 2군에 있는 최승준도 아직 잊어서는 안 될 기대주다. 최승준을 개조한 경험이 있는 정 코치는 “홈런을 만드는 능력만 놓고 보면 팀 내에서 최승준이 최고다. 정말 각도가 좋다. 왼손만 가지고도 넘길 수 있는 타자”라면서도 “타격 자세에서 움직임을 조금 줄일 필요는 있다. 시즌 중 폼 교정은 다소 위험하지만,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외 정진기 최항 박승욱도 더 많은 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타자들이다. 정진기도 한동민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오른손 사용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멀었다. 그러나 정 코치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고 박수를 쳤다. 정진기는 올 시즌 전 바깥쪽 공에 대한 대처 능력을 키우기 위해 폼 교정을 단행했다. 정진기도 “아직은 어색하다”고 말하지만, 이미 적은 기회에서도 두 자릿수 홈런을 치며 가능성을 엿봤다.
최항에 대해서는 “공에 힘을 전달하는 능력은 최정이 더 낫다. 하지만 스윙 자체만 놓고 보면 그 나이 때 최정보다 최항이 훨씬 더 좋은 매커니즘을 가졌다. 특히 낮은 공을 공략하는 능력이 그렇다”고 즐거워했다. 박승욱에 대해서도 “지금은 어느 순간 몸이 오른쪽으로 쏠리면서 문제가 생겼지만, 스윙 궤적만 놓고 보면 제일 좋은 선수”라고 기대를 걸었다. 이미 리그를 강타한 SK판 플라이볼 혁명은 여기서 끝이 아닌 것 같다. /SK 담당기자 skullbo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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