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수 한 명의 부상이 KBO 리그에 보기 드문 기이한 장면을 만들었다. 야수가 포수를 보고, 투수는 1루로 들어갔다. 그런데 두 선수 모두 기대 이상의 활약으로 팀 승리를 지켰다.
SK는 14일 인천SK행복드림구장에서 열린 한화와의 경기에서 5-3으로 앞선 8회 비상사태를 맞이했다. 5-2로 앞선 8회 2사 2루에서 대타 장민석의 좌전 적시타 때 2루 주자 로사리오가 홈을 밟았다. 여기서 태그를 하려던 포수 이홍구가 왼손 엄지 손가락을 다쳤다. 로사리오의 무릎 부위와 충돌하며 부상을 입었다. 교체가 불가피했다.
SK는 현재 엔트리에 포수 자원이 이재원과 이홍구 둘 뿐이다. 이재원은 7회 무사 만루 타석에서 대타 김동엽으로 교체됐다. 이홍구가 빠지면 말 그대로 포수 자원이 없었다. 여기에 SK는 이미 대타와 대주자로 야수 자원을 모두 소모한 터였다. 비상사태를 맞이한 SK의 선택은 포수 나주환이었다. 로맥이 2루로 들어가고, 빈 1루는 투수 전유수가 메웠다.
최정이 들어가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나주환도 정식 경기에서 포수를 본 적이 있었다. 다만 그 기억이 까마득했다. 두산 소속이었던 2005년 5월 1일 인천 SK전에서 포수 마스크를 쓴 적이 있었는데 무려 4427일 만이었다. 그러나 나주환은 씩씩하게 경기장에 들어섰다. 두려움보다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는 듯 했다.
전문 포수가 아니면 투수는 떨어지는 변화구를 던지기가 쉽지 않다. 블로킹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도루 저지에서도 당연히 불리하다. 그 와중에서도 팀의 네 번째 투수인 김주한은 김경언을 2루 땅볼로 유도했다. 하지만 잡는 과정부터 불안불안했던 2루수 로맥이 1루 송구 실책을 저질러 위기가 이어졌다. 투수 전유수가 이를 처리해주길 바라는 것은 과욕이었다.
그러나 김주한은 송광민을 상대로 변화구를 던지며 헛스윙 삼진을 유도했다. 송광민으로서는 이런 상황 탓에 빠른 공에 초점을 두고 있을 법 했는데, 나주환이 기대 이상의 안정적인 포구를 보여주면서 자신감 있게 공을 던졌다. 결국 나주환이 8회 위기를 넘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셈이 됐다.
아직 위기는 끝이 아니었다. 8회 노수광이 솔로포를 터뜨리며 6-3으로 1점을 달아났지만 3점차에 이닝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김주한과 나주환 배터리는 9회도 잘 막아내고 팀의 승리를 지켰다. 나주환이 이날 경기의 최고 공신임은 분명했다. 긴급 투입된 전유수도 1루에서 큰 실수 없이 경기를 마무리했다. 9회 강경학의 타구는 다이빙해 직선타로 처리하며 팀의 기를 확 살렸다. 공교롭게도 나주환은 이날이 생일이었다. 잊을 수 없는 34번째 생일을 보냈다. /skullboy@osen.co.kr
[사진] 인천=민경훈 기자 /rumi@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