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청각장애 극복, 머슬마니아 우승..이연화의 성장기
OSEN 엄동진 기자
발행 2017.05.22 16: 58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다, 성공의 문턱에서 건강에 무너지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최근 열린 2017 머슬마니아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이연화도 그랬다. 성공을 위해 몸을 혹사했고 건강은 잘 돌보지 않았다. 대학 학생회장을 시작해, 방송사에서 연 디자인 서바이버에서 여성으로서 파이널리스트 디자이너가 됐고, 대기업의 프로젝트도 줄곧 따냈다. 어려서부터 그렸던 성공이 목전에 와 보였지만, 그 순간 중증 이관개방증이란 이름도 생소한 병에 걸렸고, 청각장애 판정을 받는다.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시련에 꺾인 주인공이 되기보단 극복의 주인공을 택한다. 극복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고, 일반인도 힘든 머슬마니아 대회에 출전해 그랑프리를 차지한다. 장애는 스스로 극복하는 순간 불편함 정도로 남는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쉽게 할 말은 아니지만, 밝은 분위기로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이연화를 보자니, 꽤나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굉장히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로 알고 있어요. 본인 소개를 한다면요.
"사업하는 집에서 태어났어요. 사업이 그렇잖아요. 바닥까지 추락도 해보고 잘살기도 하고, 모래성 같은 집이었어요. 한 번은 집이 망했을 때, 진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했어요. 그전까진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는 아니었는데, 이런 상황에 몰려도 내가 집을 먹여 살려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거 같아요. 그 다음부터는 중고등학교 때 반장도 하고 전교 2등도 해보고 그랬어요. 고등학교 때부터는 부모님과 남동생이 해외로 가게 돼 혼자 지냈어요. 워낙 여러 가지 일을 겪어서 혼자 사는 것에 대해 방황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경희대학교에서 예술학이랑 산업디자인을 복수전공하고, 4년 내내 수석도 하고 학생회장도 했어요. 정말 열심히 살았던 거 같아요."
-대학 졸업 후에는 디자인 쪽 일을 했어요.
"우연히 디자인 서바이버 프로그램에서 연락이 왔어요. 졸업 작품 중에 하나가 대상을 받았는데 그걸로 연락이 와서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운 좋게 최연소이자 최초로 여자 파이널리스트 디자이너가 됐어요. 이후에는 기업 프로젝트도 많이 하면서 어린 나이에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일하는 게 좋았어요. 2시간 자고 바닥에서 쪽 잠 자고 그렇게 일에 푹 빠져 있었죠."
-이번 대회를 통해, 청각장애가 있는 사실이 알려지고도 했는데.
"일을 하다가 돌발성 난청이 있는걸 알게 됐어요. 정확하게는 오른쪽 청력 우이전농 진단을 받았고 동시에 양측 중증 이관개방증을 가져 청각장애 판정을 받았어요. 귀 한 쪽이 안들리는 거예요. 병원을 가니 응급질환이라고 하더군요. 오른쪽 청력 감각을 잃었다고 하고요. 그때가 이십대 초반이었는데 많이 힘들었어요. 열심히 산 보답이 이건가, 원망스러웠고요. 제 커리어에 대한 걱정도 많았죠. 1년 동안 절망을 많이 했어요. 친구들과 가족이 '위대한 사람들은 다 한 번씩 아픈거야''자소서 쓸 때 한 줄 더 쓸 수 있겠네'라고 위로하는데 사실 위로가 안됐죠. 나중에 자식이 엄마라고 부르는데 못 알아들으면 어떻하지란 걱정까지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가능한 치료는 다 해보려고 했어요. 고용량 스테로이드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부작용 크다며 권유하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하겠다고 했어요.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잡고 싶었으니까요. 스테로이드 부작용 때문에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지만 감수하고 치료를 계속했어요."
-치료 후에는 극복하게 되던가요.
"오른쪽 귀의 30% 정도 세포가 돌아왔어요. 죽었다가 살아온 세포라 남들이 듣는 것 보다는 여전히 불편하죠. 신경 세포가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하고 진동 필터링이 안돼서 이명 같은게 들리고요. 치료받고 청력과 감각이 돌아온 것만 해도 행복하다 했지만 1년 동안 그 원망과 우울과 좌절감을 겪으니, 일을 다시 하기 무서운 상태였고, 잠을 자려고 누워도 소리가 나니 힘들었어요. 잠을 못자니 우울증이 생기고 그러니 폭식을 하게 되고 결국 몸무게도 15kg이 늘었어요. 귀가 잘 안들리니 발음도 이상해지면서 결국 대인기피까지 생기고 집에만 누워 있었죠." 
-극복하기 힘들었겠어요.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했죠. 결국 다시 일을 해야 했어요. 상시 이명(신경성이명인 삐- 등의 소리가 일정시간동안 들리다 없어지는 것과는 다른)을 듣고 살아야 하는 후유증이 남았지만 스스로 견디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죠. 로터스 그룹이라는 디자인 회사를 차리고 건강이 최고니 즐기면서 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면서 시작한 게 운동이었죠. 너무 제 몸에 관심이 없었던 거 같아요. 그렇게 운동을 하다보니 잠도 잘 수 있게 되고, 운동하면 기분 좋은 호르몬이 생긴다고 하는데 정말 운동 후에는 개운함을 느낄 수 있겠더군요. 삶의 활력이 생겼어요. 다시 긍정적인 예전의 나로 돌아온 거 같았죠. 그렇게 운동을 시작해 대회에까지 출전하게 된 거 같아요."
-운동 역시 쉽지는 않았겠어요.
"처음에는 수영이나 가벼운 운동을 했어요. 그러다 운동의 맛을 알았죠. 운동을 하니 잠을 잘 수 있고 사는 느낌을 받았어요. 운동을 하고 몸이 만들어지는 게 보이니까 주변에서 본격적으로 PT를 받자고 하더군요. 대회에 나가보자는 제안도 있었고요. 이관개방증 때문에 유산소 운동은 할 수 없어서 무산소 운동에 집중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근육이 발달하게 됐어요. 머슬마니아라는 대회를 알게된 건 대회 한달 전이었어요. 출전하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도 몰랐고, 포징이나 워킹은 해본적도 없었고요. 그래도 의상까지 직접 만들어가면서 준비했어요. 워킹 연습하면서는 모델들을 진심으로 동경하게 됐고요. 그래도 좋은 성적까지 기대하기는 힘들었는데 그랑프리를 타게 됐고, 제게는 큰 의미가 있었던 대회인거 같아요. 전 사실 외모보다는 똑똑하고 화려한 커리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공부만큼 열심히 사는 것만큼 건강도 중요하단걸 알게 됐고, 그게 결국 상으로까지 받을 수 있어서 여러모로 의미가 큰 거 같아요. 외모에 대한 편견도 사라졌고 마음과 몸도 아름다워야 삶이 굴곡없이 굴러가는구나라는 걸 알게 해준 대회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힘들었던건요.
"역시 워킹과 포징이었죠. 경험이 없으니까요. 무대 위에 올라가는 건 자신있었지만 무대 위에서 끼를 부려본 건 처음이니까요. 운동할 때 제일 힘들었던건 남들과는 다른 조건에서 약물까지 갖고 해야된다는 점이었죠. 숨이 차면 멈춰야 하니, 선생님도 고생하고 곤란해하고 세트도 이어가기 힘들었고요. 대회에서는 말이 걱정이었어요.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하지를 걱정했어요. 물약을 챙겨갈 수 없으니 돌발로 말을 시키거나 하면 발음이 완전하지 않은데다가, 귀가 울릴 때 말을 하게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다행히 말을 많이 하는 대회는 아니어서 괜찮았어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일을 해왔는데 패션에서 시작해 피트니스 등 파생된 분야까지 하고 있어요. 이 베이스를 바탕으로 라이프스타일 아이콘 같은게 되고 싶어요. 그들에게 맞는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할 수도 있고 영감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고요. 할 수 있다면 방송이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싶어요. 가장 빠르게는 머슬마니아 출전권을 얻어서 6월에는 마이애미에서도 경쟁하게 됐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청각장애를 갖고 머슬마니아 그랑프리를 받게 돼 알려졌지만, 제 장애를 강조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것보다는 이관개방증을 앓고 계신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이관개방증은 경증이던 중증이던 최근에 알려진 병명이라 국내 유명한 병원을 가도 제대로 진단을 받기 힘들거든요. 전 스스로 일본의 병원을 찾아가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지만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고요. 그래서 그런 노하우를 알려드릴 수 있다면, 이 병이 조금더 알려지고 치료받지 못한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을 거 같습니다. 열심히 살아왔고, 앞으로도 열심히 건강하게 살아갈테니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kjseven7@osen.co.kr
[사진] 이연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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