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만 매직이 SK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암흑기 롯데를 바꿔 놓은 로이스터 매직이 오버랩된다.
트레이 힐만 감독이 이끄는 SK는 개막 6연패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이후 7승1패를 거두며 5할 승률을 맞췄다. 최근 5연승으로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있다. 아직 시즌 초반이고, 벌써 성공과 실패를 논하기 이른 시점이지만 힐만 야구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건 틀림없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2008년, 롯데를 처음 맡아 '노피어' 두려움 없는 야구로 포스트시즌을 이끈 제리 로이스터 전 감독이 떠오르는 이유다. 선수들과 수평적인 관계로 리더십이나 지도 방식은 비슷하지만 야구 색깔과 스타일은 상반된다. 현역 때 내야수로 뛰었고, 메이저리그 감독·코치 경험이 풍부한 두 사람이지만 KBO리그에선 닮은 듯 다르다. 한화 김성근 감독은 "로이스터가 미국 스타일로 우직하다면 힐만은 일본야구를 경험해본 만큼 세밀함이 있다"고 요약했다.
▲ 격의없는 소통, 아메리칸 리더십
SK 정의윤은 지난 15일 대전 한화전에서 8회 대타 홈런을 치고 난 뒤 덕아웃에 들어오며 힐만 감독의 가슴을 오른 주먹으로 강하게 때렸다. 우리나라 정서상 선수가 감독의 몸을 건드리는 건 불경(?)에 가깝다. 하지만 정의윤의 펀치는 힐만 감독의 특별 주문이었다.
힐만 감독은 "정의윤은 안 될 때 많이 고민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스타일이다. 나를 때려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폭행을 허락했다. 정의윤은 16일 한화전에서 시즌 첫 3안타를 쳤고, 경기 후 승리 하이파이브 때 힐만 감독의 가슴을 또 쳤다. 격의 없는 아메리칸 스타일. 정의윤은 "감독님께서 선수들을 거리감 없이 편하게 대해주신 덕분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로이스터 감독도 그랬다. 경기 후 하이파이브 때 포수 강민호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입을 크게 벌려 포효하는 '하마 세리머니'는 롯데 승리의 상징과 같았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선수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 1대1 면담을 통해 선수들을 하나씩 알아갔고, 지시가 아니라 쌍방향으로 소통을 했다. 감독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10년 전 KBO리그 풍경을 떠올리면 엄청난 파격. 단, 선수들이 주눅들거나 자신감 없는 플레이를 할 때만은 불호령을 내리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두려움을 지우는 데 애를 썼다.
힐만 감독도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데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15일 한화전에서 데뷔 첫 퀄리티 스타트로 시즌 첫 승을 거둔 선발투수 문승원은 "앞선 NC전에서 난타당했지만 감독님께서 따로 불러 '오늘 잘했다. 1~2회는 안 좋았지만 3~4회 잘 막아줘서 고맙다. 넌 잘할 수 있는 선수'라고 말씀해주셔서 다운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4번타자로 자리 잡은 김동엽도 "팀 분위기가 너무 좋다. 감독님과 코칭스태프가 편하게 해주는 게 실력으로 나오는 것 같다. 감독님이 '오늘 하루를 즐기려 하다 보면 그날이 잘 풀릴 것이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 말대로 마음 편하게 즐기니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이야기했다.
힐만 감독은 "시즌을 치르다 보면 좋을 때와 안 좋을 때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개막 6연패로 시작했지만 초조하거나 불안하진 않았다. 매일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려 했다"며 "선수들이 좋은 플레이를 꾸준히 하는 건 쉽지 않다. 감독으로서 선수들이 성공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게끔 유도하는 건 항상 평정심을 갖고 일관성 있게 대하는 것이다. 경기에 지면 나도 스트레스를 받지만, 싫은 내색하지 않으려 한다"고 철학을 밝혔다.
▲ 선굵은 로이스터, 디테일한 힐만
로이스터 감독은 벤치의 작전 개입보다 선수들에게 자율을 맡기는 선굵은 야구를 추구했다. 희생번트는 2008~2010년 3년간 8개팀 체제에서 5-6-7위. 팀 도루도 2008년 부임 첫 해에만 3위로 평균 이상이었지, 2009~2010년은 7-6위였다. 이대호를 필두로 홍성흔·가르시아·조성환 등 강타자들이 많았던 롯데 타선의 장타력을 극대화했다. 특히 초구부터 좋은 공이 들어오면 치고, 한 베이스씩 더 전진하는 공격성을 주입시켰다.
특별한 부상 변수가 없는 한 주전 라인업은 거의 고정돼 있었고, 투수 보직도 각자 역할을 분명하게 나눴다. 선발투수는 가급적 길게 가져갔고, 불펜 비중을 최소화했다. 당시 롯데 불펜이 약한 영향도 없지 않다. 3년간 선발 이닝은 1-2-1위였고, 투수 교체 횟수는 8-7-7위. 장기레이스에선 로이스터식 야구가 통했다. 정규시즌 3-4-3위로 3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올랐지만 가을야구는 한 번도 못 이겨 단기전에 약점을 드러냈다.
힐만 감독의 야구 색깔은 로이스터 감독과 다르다. 아직 부임 초기인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고정 라인업보단 여러 선수들을 번갈아가며 고르게 쓰고 있다. 최정·김동엽을 빼면 붙박이 주전 없이 전 포지션에 경쟁 구도가 생겼다. 힐만 감독은 "144경기 전체를 부상 선수 없이 보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 몸이 지치거나 정신적으로 힘든 선수들에게 휴식을 자주 줄 것이다"며 "과거 기록을 토대로 어떠한 유형에 강하고 약했는지, 최근 선수와 경기 흐름도 본다. 경기 당일 누가 그날을 지배할 수 있을지를 보고 라인업을 짠다"고 밝혔다. 2번 박정권, 5번 정진기 같은 보통 감독이라면 쉽지 않은 타순 배치뿐만 아니라 나주환이 김성현을 밀어내고 주전 2루수 자리를 굳혀가는 것도 팀 전체 경쟁 체제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트레이드마크가 된 극단적인 수비 시프트는 힐만 감독의 디테일함이 잘 나타난다. 초반 시행착오가 몇 차례 있었지만, 당겨치는 풀히터들에겐 적중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SK 약점 중 하나였던 주루 플레이도 확 달라졌다. 지난해 71개로 리그 최다였던 주루사가 올해는 1개로 리그 최소. 힐만 감독은 "한미일 어느 곳에서든 베이스러닝은 굉장히 어렵다. 캠프 때 김인호·정수성 1·3루 베이스코치가 선수들과 집중적으로 연습했고, 사인을 잘 숙지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적극적인 움직임이 달라졌고, 선수들도 이젠 주루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하다"고 말했다. 도루 숫자는 7위이지만 느린 팀이라는 이미지를 지웠다.
마운드 운용은 로이스터 감독과 비슷하다. 선발투수들의 이닝 비중을 높게 두고, 불펜투수들은 이닝 중간 교체보다 1이닝씩 확실히 끊어가며 책임을 부여하는 것도 닮았다. 13일 문학 롯데전에선 선발 김주한이 8실점할 때까지 놓아뒀고, 전날 블론세이브한 마무리 서진용을 다시 1점차에서 투입하는 인내심과 똑심을 보였다. 힐만 감독은 "서진용의 구위나 공격적인 투구는 긍정적이었다. 마무리로서 겪어야 할 성장통"이라고 받아들였다.
이제 SK는 14경기밖에 치르지 않았고, 힐만 감독 야구를 전부 담기엔 샘플이 모자라다. 앞으로 남은 130경기에서 보여줄 게 많이 남았다. 하지만 첫 14경기에서 분명한 컨셉과 메시지를 보여준 만큼 KBO리그에 새로운 트렌드를 불러일으킬 듯하다. 과거 로이스터 열풍처럼 힐만 매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waw@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