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굳이 숨어야 할 이유가 없다".
SK 트레이 힐만(54) 감독은 디테일에 강한 야구인으로 알려져있다. 미국 메이저리그뿐만 아니라 일본프로야구도 경험한 만큼 세밀함에 강점이 있다.
그런 힐만 감독이 지난 25일 문학 한화전 시범경기에서는 다소 의외의 모습을 보여줬다. SK가 0-3으로 뒤진 7회말 무사 1·2루에서 김민식에게 사인을 내는 과정, 힐만 감독은 1루 덕아웃 앞에서 상대 벤치에서 훤히 보이는 동작으로 사인을 줬다. 정수성 3루 베이스코치가 이를 전달받고 타자에게 사인을 넘겼다.
힐만 감독은 사인 동작이 컸을 뿐만 아니라 빠르지 않고 느렸다. 맞은편 3루 덕아웃에 앉은 김성근 한화 감독도 고개를 들어 힐만 감독의 사인을 바라볼 만큼 정면 노출했다. 양 팀 벤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김민식은 번트를 대지 못했지만 풀카운트 끝에 볼넷을 골라내 만루로 찬스를 연결했다.
이튿날 경기 전 만난 힐만 감독은 이에 대해 "내가 숨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다른 팀에서 사인을 훔치려 하겠지만 우리 사인 시스템이 복잡한 편이라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 한 번은 맞출 수 있겠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 사인 시스템을 완벽하게 훔치기는 어렵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지난 1990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힐만 감독은 경험이 풍부하다. 27년간 사인을 내는 일을 했다.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사인을 잘 훔치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그동안 수많은 사인을 주며 실수를 해왔지만 거기서 배운 것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인 동작을 복잡하게 하지 않으려 한다. 선수들이 헷갈리지 않게끔 하는 게 핵심이다"며 "한국에서도 이미 다른 팀에서 우리 사인을 훔친 적이 있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 사인을 유심히 보길래 일부러 보여줬다. 그 팀의 의도를 체크하기 위함"이라고 자신했다.
디테일에 강한 힐만 감독은 오히려 사인 동작을 노출함으로써 상대에 역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인 노출 과정을 통해 그 팀과 코칭스태프의 성향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정보가 된다. 우리 사인 체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KBO리그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었던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은 2010년 당시 SK 김성근 감독과 사인 훔치기 논란으로 설전을 벌인 바 있다. 어느 나라 야구든 사인 훔치기와 노출은 쉽게 보이지 않는 디테일한 승부다. 힐만 감독은 시범경기부터 의도된 사인 노출로 상대 벤치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waw@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