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2017 WBC는 한국 대표팀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참사, 악몽으로 남을 것이다. 본선 첫 두 경기에서 잇따라 패배하면서 일찌감치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후폭풍은 거셌다. 와중에 일부 대표팀 선수들의 경솔한 태도 논란까지 더해져 비난 여론은 걷잡을 수 없게 증폭됐다. 인신 공격까지 더해져 마녀 사냥 수준이다.
태극마크에 대한 헌신, 열정, 정신력까지 언급되고 있다. 물론 패배 자체와 경기 내용에서 야구팬들의 눈에 비친 모습은 실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대표팀 선수들이 태극마크에 대한 자부심, 대표선수로서 기본적인 자세를 망각했을까. 승리에 관심 없고, 제 몸 사리기에 급급했을까.
오승환(세인트루이스)은 대표팀 합류를 앞두고 대표팀의 예상 성적, 목표에 관해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는 "매 경기가 중요하다. 마운드에 올라가서 1경기 1경기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이다. 결과는 따라올 것이다"고 말한 뒤 속내를 보였다.
"사실 WBC는 선수들 처지에서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평소보다 더 빨리 몸 상태를 끌어올려야 하고, 국제대회의 성적 부담도 늘 있다. 결과는 그 다음인데, 만약 결과가 안 좋으면 고생한 과정까지 모두 잊혀지는 점이 아쉽다"고 했다.
2006년 1회 WBC부터 4차례 WBC를 모두 참가하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등 그동안 대표팀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 이번 WBC에서 대표팀은 1라운드 탈락, 그의 말처럼 과정은 결과에 묻혀버린 채 엄청난 비난에 휩싸였다. 건전한 비판, 합리적인 비난과 무분별한 인신 공격은 구분되어야 한다.
선수들은 연습경기라도 지는 것보다는 이기고자 한다. 국제대회에서 부진한 성적 뒤에 따라오는 비난도 잘 알고 있다. 오승환은 "무조건 잘 던져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다"고 했다. 결과가 나쁘면 중간에 아무리 고생을 했더라도, 그 노력은 잊혀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오승환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말을 지켰다. 이스라엘전 1-1 동점인 8회 2사 만루에서 등판해 1⅓이닝 3탈삼진 무실점, 대만전 8-8 동점인 9회 무사 2루 끝내기 패배 위기를 막는 등 2이닝 3탈삼진 무실점 피칭으로 승리 투수가 됐다. 대표팀은 1라운드 탈락했지만 오승환의 피칭은 그나마 위로가 됐다.
감기 몸살로 대만전 선발 라인업에서 빠졌다가 연장 10회 대타로 나서 쐐기 투런 홈런을 때린 김태균은 대회가 끝난 후 "몸 관리(감기 몸살)를 잘 못한 것은 내 잘못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WBC라는 각오도 있었고, 후배들과 좋은 성적을 내서 야구팬들에게 기쁨을 주려고 평소보다 몸을 빨리 만들어 모든 힘을 WBC에 맞췄다. 결과가 좋지 않아서 모든 선수들의 노력에 안 좋은 평가가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경솔한 거수 경례에 대한 비판은 받아 마땅하겠지만, 준비 과정의 진정성까지 의심받는 것은 그로서는 억울한 부분도 있다.
단기전, 게다가 3월에 열리는 국제대회는 경기 당일 컨디션이 가장 중요하다.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기 위해 몸 상태를 얼마나 시즌에 가깝게 끌어올리는 것이 성적의 바로미터가 된다. 하지만 대표팀은 전체적으로 몸 상태를 WBC에 맞춰 끌어올리는데 실패했다. 특정 선수 한 두 명의 잘못이 아니다. 올해부터 2월로 늦춰진 구단들의 캠프 출발, 긴 일정의 대표팀 합숙 훈련, 잔부상 등 이유는 제각각일 것이다.
미국 애리조나 캠프에서 몸을 만들던 이대호는 대표팀의 일본 오키나와 합숙 훈련 참가 요청을 받고 합류하느라 중간에 일정 4일을 이동하는데 까먹었다. 롯데 복귀 시즌을 앞두고 태극마크를 단 이대호는 "국가대표는 나라에서 부르는 것이기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국민을 대표해서 나가는 것이기에 더욱 잘 해야 한다"고 했다.
1라운드 탈락이 확정된 후 대만전에서 이대호는 헬멧에 강속구를 맞는 아찔한 사구를 맞았다. '내 몸이 아니다'는 이대호는 계속 경기에 출장했고 두 번째 사구까지 맞는 불상사를 당했다. 아픔을 참고 뛰며 적시타까지 때렸지만, 이미 도를 넘은 비난 속에 그의 투혼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과거 1회 대회에서 전원 메이저리거로 구성된 미국 대표팀은 2라운드 탈락으로 망신을 당했다. 실력이 아니라 3월에 열리는 대회의 준비 부족이었다. 대표팀은 과거 철저한 준비로 메이저리거와의 실력 차이를 메웠지만, 2013 WBC부터 메이저리거들의 준비 자세가 달라졌다. 그들도 자국의 대표팀이라는 자부심 아래 뭉치고, 확실한 목표의식을 갖고 경기에 들어온다. 대표팀이 2006년, 2009년의 성적을 내기란 쉽지 않다.
이스라엘 대표팀은 지난해 9월 본선 티켓을 따낸 뒤 전략적으로 이번 대회를 준비해왔다. 전 메이저리거 베테랑과 동기부여가 확실한 마이너리그 선수들로 구성된 이스라엘이 마치 2006년 한국 대표팀을 보는 듯 했다.
실패를 통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WBC 실패는 무엇부터 잘못됐는지 이미 KBO나 선수들이나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가 다음 대회, 다음 대표팀을 위한 과정이 시작된다. 다음에도 과정이 결과에 묻히지 않기 위해서는 냉철한 분석과 그에 따른 변화, 실천이 필요하다. /orange@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