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팀 유니폼을 입는 길은 힘들었지만, 역시 인상은 강렬했다. 오승환(35·세인트루이스)이 탈락으로 만신창이가 된 한국 대표팀의 유일한 위안으로 이번 대회를 마무리했다. 구세주는 구세주였다.
오승환은 9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7 제4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만과의 예선 1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8-8로 맞선 9회 무사 2루라는 절대 위기에서 등판해 무실점으로 버티며 한국을 구해냈다. 9회에 탈삼진 2개, 외야 뜬공 하나를 기록하며 주자를 3루로 보내지 않았다. 이날 기록은 2이닝 무피안타 3탈삼진 무실점 승리투수. 대회 전체 기록은 3.2이닝 1피안타 6탈삼진 무실점이었다.
6-0으로 앞서 있다 불펜 난조로 8-8 동점까지 허용한 한국은 9회말 대만의 마지막 공격에서 궁지에 몰렸다. 9회 마운드에 오른 이현승이 선두 장즈시엔에게 우익수 옆에 떨어지는 2루타를 맞은 것이다. 안타 하나면 그대로 경기 끝, 한국의 1라운드 전패 및 예선 강등이었다. 여기서 믿을 선수는 오승환밖에 없었다.
절대위기였지만 오승환은 흔들리지 않았다. 린즈성을 4구째 루킹 삼진으로 처리했다. 번트작전을 하지 않은 대만 벤치를 상대로 스트라이크존을 완벽하게 활용하며 귀한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았다. 이어 린이취엔을 고의사구로 내보낸 오승환은 가오궈후이와의 승부에서 4구째 슬라이더로 헛스윙 삼진을 잡아내고 차분하게 위기를 풀어나갔다. 한결 어깨가 가벼워진 오승환은 천용지도 우익수 뜬공으로 처리하고 이닝을 마무리했다.
오승환의 역투에 다시 힘을 얻은 한국은 연장 10회 1사 후 오재원 손아섭의 연속안타와 양의지의 결승 희생플라이, 그리고 김태균의 대타 쐐기 투런포까지 나오며 11-8로 리드했다. 오승환은 경기 마무리를 위해 연장 10회에도 마운드에 올라 무실점으로 대만 타선의 추격을 저지했다. 대만에는 절망적인 존재였다.
"오승환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는 말이 절로 나올 대회였다. 당초 2016년 초 불거진 불법원정도박으로 인한 징계가 문제가 돼 대표팀에는 빠진 오승환이었다. 그러나 주축 선수들의 부상 이탈 속에 마운드 무게감을 우려한 김인식 감독은 지속적으로 “오승환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비친 끝에 결국 오승환에 대표팀 유니폼을 입혔다.
메이저리그(MLB) 스프링캠프를 준비하고 있었던 오승환은 충실히 몸을 만들어 국가의 부름에 응답했다. 여전히 싸늘한 시선이 있었지만 오승환은 묵묵하게 자신의 공을 던졌다. 그리고 한국의 1라운드 조기 탈락의 충격 속에서도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선수로 기억됐다.
이스라엘전에서도 비록 졌지만 오승환이 없었다면 경기는 연장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1-1로 맞선 8회 2사 만루라는 절대 위기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른 오승환은 버챔을 공 4개만에 한가운데 패스트볼로 루킹 삼진 처리하고 이스라엘의 예봉을 꺾었다. 그 후 오승환은 9회에도 탈삼진 2개를 포함해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치며 관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네덜란드전에는 등판하지 않은 오승환은 비교적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대만전에 올라 명불허전의 구위를 과시했다. 어쩌면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던지는 마지막 경기일 수도 있었는데 끝까지 '돌부처'의 위용을 선보였다. /skullboy@osen.co.kr
[사진] 고척=박준형 기자 /soul1014@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