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KBO 리그에 기량발전상(MIP)이 공식적으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2016년 이 상의 주인공은 김재환(29·두산)이었을지도 모른다. 2008년 프로데뷔 후 2015년까지 1군 통산 홈런이 13개에 불과했던 김재환은 지난해에만 37방의 대포를 뿜어내며 두산 토종 타자 역사를 줄줄이 새로 썼다.
김재환은 두꺼운 두산 야수진 속에서 기회를 얻지 못해 잊혀가던 유망주였다. 그러나 지난해 한 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논란이야 있지만 어쨌든 건장한 체구에서 나오는 엄청난 힘을 빛을 발했다. 여기에 흔들렸던 타격 밸런스도 잡혔다. 공을 좀 더 정확히, 강하게 맞힐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는 선천적인 힘과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냈다. 타구속도가 빠르면 자연히 성적은 따라온다. 내년도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김재환의 타구속도는 KBO 리그 토종 선수들의 속도계까지 바꿨다. KBO 공식기록업체 ‘스포츠투아이’의 HTS 시스템에 따르면 김재환의 올해 타구속도(인플레이타구 기준·번트타구 제외)는 137.5㎞다. 최정(SK)과 함께 국내 선수로는 리그 공동 1위에 올랐다. 외국인 선수까지 다 포함해도 김재환의 위에는 육안상으로도 미친 듯한 괴력을 자랑했던 에릭 테임즈(전 NC·138.5㎞)밖에 없다.
타격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홈런 타구속도에서는 당당히 전체 1위였다. 올해 김재환이 터뜨린 37개의 홈런 타구 평균 속도는 161.6㎞에 이르렀다. 타구 평균 각도는 28.5도, 평균 비거리는 119.4m였다. 마치 라인드라이브 같이 빨랫줄처럼 담장을 넘기는 타구가 많았는데 웬만한 힘이 아니라면 흉내 낼 수 없는 곡선이다. 아직 힘이 떨어질 나이는 아니라는 점에서 내년에도 정상급 성적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김재환의 타구속도에 도전할 만한 국내 선수는 누구일까. 우선 평균 타구 속도 상위 10위권 선수(규정타석 이상 소화)들에 관심이 몰린다. 최정은 김재환과 같은 평균 타구 속도를 기록하며 ‘소년장사’의 힘이 어디 가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김태균(한화·137㎞), 민병헌(두산·136㎞), 최형우(KIA·134.6㎞), 오재일(두산·133.9㎞), 이범호(KIA·133.8㎞), 박건우(두산·133.8㎞), 황재균(롯데·133.6㎞), 이승엽(삼성·133.5㎞)이 그 뒤를 따랐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두산과 베테랑이다. 두산은 타구속도 10위 안에 무려 4명의 선수가 이름을 올렸다. 단순히 힘만 세다고 타구속도가 올라가는 것은 아닌 만큼 두산 타자들의 ‘정교한 힘’을 실감할 수 있다. 괜히 리그에서 가장 타격이 좋은 팀은 아니었던 셈. 김태균 이범호 이승엽 등 30대 중반을 넘긴 베테랑 타자들의 건재도 눈에 띈다. 특히 이승엽은 마흔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수치를 내고 있다. 앞으로 이런 선수가 다시 나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편 홈런 타구 속도(15홈런 이상)는 순위표가 조금씩 달랐다. 김재환의 1위 자리를 넘봤던 선수는 지난해 25개의 홈런을 친 나지완(KIA·160.9㎞)이었다. 3~5위는 차례로 강민호(롯데·160.5㎞), 최준석(롯데·160.5㎞), 나성범(NC·159.6㎞)이었다. 이들은 맞는 순간 홈런을 직감케 하는 호쾌한 궤적과 힘들의 소유자다.
6~10위는 박정권(SK·159.4㎞), 이호준(NC·159.4㎞), 오재일(두산·158.7㎞), 김주형(KIA·158.3㎞), 최정(SK·158.2㎞) 순이었다. 김재환이 낮은 각도를 그린다면, 최정은 특유의 높은 홈런 포물선(타구각도 31.8도)으로 잘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사뭇 다르다. 이호준과 박정권의 여전한 힘, 그리고 김기태 감독이 김주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순위다. /skullbo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