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아, 너 지명됐어. 정말 축하해!”
2016년 8월 22일. 남윤성(30)은 평소와 다름없이 묵묵히 운동을 하고 있었다. 신인지명회의장에는 가지 않았다. 가서 괜히 마음을 졸이는 것보다, 차라리 하루라도 운동을 더 하자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 긴장감이 싫었다. 그때, 남윤성의 휴대전화에 갑자기 수십통의 문자메시지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지명됐다는 축하 메시지. 남윤성은 “지명이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떻게 딱 감정을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했었다”고 당시를 떠올린다.
사실 남윤성은 이보다 더 큰 기쁨을 11년 전에 경험할 수도 있었다 11년 전, 그는 2016년처럼 2차 6라운드 선수가 아닌 당당한 1차 지명 선수였다. 신일고 시절 고교 최정상급 왼손 투수로 평가됐던 남윤성은 두산의 2006년 1차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KBO 리그에 가지 않았다. 최고의 무대에서 뛰어보고 싶은 생각에 텍사스와 계약을 맺었다. 고등학교에서 잘한다는 선수는 너도 나도 MLB 무대를 노크하던 시절이었다. 남윤성도 그 배를 탔다.
남윤성은 “어릴 때는 무조건 최고가 되고 싶었다”고 운을 떼면서 “두산 구단이나 두산 팬분들에게는 아직도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배신감을 느끼셨을 거다. 죄송하다. 하지만 어릴 때는 무조건 최고 무대에서 한 번 뛰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갔다”고 담담하게 회상한다. 하지만 힘차게 떠난 배는 아쉽게 얼마 가지 못하고 기울었다. 그리고 한 번 기운 배는 다시 원래의 항로를 찾지 못했다.
남윤성의 우여곡절 야구인생은 잘 알려진 터다. 마이너리그 초반은 좋았다. 더블A까지는 무난하게 올라가는 듯 했다. 그러나 승격을 앞두고 어깨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최고였지만, 남윤성의 말을 빌려 ‘마이너리그에도 160㎞를 던지는 선수가 5~6명이나 있는’ 미국에서는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유망주였다. 치명적인 수술을 받은 남윤성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2012년 텍사스에서 방출된 후도 힘들었다. 일본프로야구를 노크했지만 번번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아물지 않은 어깨의 상처로는 큰 벽이었다. 독립구단에서 뛰기도 했고, 동기들이 가는 국군체육부대나 경찰야구단은 남의 이야기로 미룬 채 훈련소로 향했다. 2016년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그만뒀다. 남윤성은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았다.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몸이나 마음이 지쳐 있기도 했다. 무기력한 시간이 꽤 오래 갔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게 맞은 우리나이 서른. 그런데 공교롭게도 서른 즈음이 되자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서니, 다른 게 보였다. 남윤성은 “1년의 시간이 참 소중했다. 마음도 다잡고, 몸도 재정비했다. 왜 아팠는지, 어떻게 운동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를 많이 생각했던 시간”이라고 1년을 돌아봤다. 주위에서의 격려도 큰 힘이 됐다. 남윤성은 “내가 야구를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로 주위의 끊임없는 성원을 뽑는다. 그 끝에는 SK의 지명이 있었다.
그렇게 11년을 돌고 돈 남윤성은 구단 역사상 최고령 신인이 됐다. 지난해 11월에는 가고시마 유망주 캠프에도 합류해 땀을 흘렸다. 캠프 최우수선수(MVP)로도 뽑혔다. 기량이 특출 나서 그런 게 아니라, 워낙 성실하게 훈련을 해서라는 이유였다. 남윤성은 “공백기가 좀 길다보니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하지만 해 볼만 하겠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다보니 자꾸 더 하게 되더라. 내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고, 어디까지 올라가면 승부가 되겠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캠프 성과를 뽑았다.
남윤성의 한창 때 최고 구속은 약 91마일(146㎞) 정도. 그러나 어깨 수술에 공백기까지 길어 지금은 최고 130㎞대 중반에 머물고 있다. 왼손으로 뛰어난 제구, 그리고 수준급의 커브를 던지기에 구속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는 관계자가 많다. 남윤성도 “기본적으로는 140㎞ 초반이나 그 이상은 나와야 변화구나 제구로 승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아프지는 않은데 지금껏 무의식적으로 많이 움츠려 있었다. 현재 몸에 약한 부분,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으면 구속이 회복되지 않을까”고 조심스레 자신했다.
신일고 시절 고교 무대를 호령하던 ‘남윤희’(개명 전 이름)는 기억의 흔적에서 사라졌다. 단지 만 30세의 KBO 리그 신인 남윤성이 있을 뿐이다. 사실 언제 방출돼도 할 말이 없는 불안한 신분이기도 하다. 남윤성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는 각오다. 자신을 ‘오랜 기간 기름칠이 안 된’ 기계로 비유한 남윤성은 “11년 동안 감사한 분들을 많이 만났다. 야구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많았지만 나보다 더 의욕적으로 노력해주신 분들 덕택에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후회 없이 즐겁게 야구를 하고 싶다. 10~11을 지나오면서 느낀 점도 많다.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손에 쥐고 있던 자존심이나 욕심을 많이 내려놓은 것 같다. 지금은 결과는 하늘에 맡기자고 생각한다. 대신 작은 일이라도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지금까지 걱정을 너무 많이 했는데, 이제는 좀 자유롭게 내려놓고 싶기도 하다. 사실 예전에는 내 인생에 대해 후회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11년간 필요하지 않은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시간에 있었기에 단단해졌다고 생각한다. 너무 감사하다. 그런 마음으로 야구를 하고 싶다”
야구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을 알기까지 무려 11년이 걸린 서른 살 루키의 항해가 다시 시작됐다. 구단과 남윤성은 어렵게 지켜온 그 항해도에 적힌 경험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skullboy@osen.co.kr